“제가 직접 네덜란드어 기사를 본 건 아니고요. A축구 동호회에 올라온 글을 보고 믿을 만하다고 생각돼서….”(인터넷 뉴스 기자) “B축구 동호회에 올라온 글을 옮긴 것입니다.”(A동호회 회원) “제가 먼저 쓴 게 아니라 C축구 동호회에 글이 올라왔기에 베낀 거예요.”(B축구 동호회 회원)

지난주 세간을 뜨겁게 했던 ‘히딩크 인터뷰  오보 소동’에 관계된 사람들이 내놓은 해명들이다. 사태의 전말을 보면 황당하기 짝이 없다. 어쩌면 사소한 해프닝일 수 있지만 이 사건은 우리 언론계의 베껴쓰기 관행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보여주는 사례로 되짚어볼 만한다.
 

ⓒAP Photo히딩크 전 감독(위)은 월드컵 기간 네덜란드 방송 중계 해설을 맡았다. 하지만 한국 대표팀 코치진을 과격하게 비난하지는 않았다.

히딩크 인터뷰 오보 소동은 지난 6월17일 남아공 월드컵 조별 예선 2라운드에서 한국이 아르헨티나에 1대4로 크게 지면서 시작됐다. 한국 대표팀의 졸전에 대해 언론의 비난이 쏟아졌다. 특히 6월20일부터 언론은 거스 히딩크 전 국가대표 감독이 한국 대표팀의 경기 내용에 대해 쓴소리를 했다는 외신을 인용 보도했다.

“B조에서 한국의 16강 진출이 가장 어둡다”“한국은 아르헨티나의 공격에 맞서 축구가 아닌 야구를 했다” “코칭스태프가 아르헨티나가 남미 예선에서 패한 6경기의 비디오를 봤는지 의심스럽다” “대체 그리스전 승리 이후 코치진은 선수들에게 무슨 짓을 한 것인가?”

인용 구절은 다소 차이가 있지만 번역된 문장자체는 복사한 듯 똑같았다. 이 내용은 조선일보·중앙일보·YTN 등 주요 언론사 홈페이지에 기사화됐고 포털 뉴스의 메인 화면에도 오르며 가장 많이 본 뉴스로 꼽혔다. 6월18일 거스 히딩크 전 감독이 네덜란드 축구잡지 〈풋볼 인터내셔널〉과 인터뷰한 내용이라고 했다. 

아르헨티나에 대패한 충격에 뒤이은 탓인지 이 기사는 여파가 컸다. 대학생 김경희씨는 “‘한국 탈락할 것’이라는 식의 기사 제목을 보고 참 놀랐다. 히딩크 감독이 저렇게 심한 말을 한 것인지 의아스러웠다”라고 당시 느낌을 말했다.

평소 히딩크 감독의 어법을 아는 사람이라면 이 기사를 보고 고개를 갸웃거릴 만하다. 아무리 애정 어린 비판이라지만 지나치게 표현이 단정적이고 과격하기 때문이다.

이 인터뷰는 실은 모두 조작된 것이었다. 먼저 네덜란드에는 〈풋볼 인터내셔널〉이라는 잡지가 없다. 대신 비슷한 이름의 〈풋발 인터내셔널〉(Voetbal International)이라는 주간지가 있다. 이 잡지는 45년 전통을 자랑하는 네덜란드의 유력 축구지다.

〈시사IN〉은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풋발 인터내셔널〉 본사에 직접 문의를 해봤다. 편집국 관계자는 “최근에 거스 히딩크와 인터뷰를 한 적이 없다”라고 밝혔다. 또 “우리 잡지는 매주 수요일 발간되며 이번 주는 특별히 월요일(6월21일)에 발간될 예정이다”라고 덧붙였다. 물리적으로 6월18일에 한 인터뷰가 6월20일 전에 공개될 수는 없는 것이다. 온라인판에도 히딩크 인터뷰 내용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럼 도대체 히딩크가 〈풋볼 인터내셔널〉과 인터뷰를 했다는 기사는 어떻게 탄생한 것일까. 〈시사IN〉이 추적해본 결과 낚시글(속임수 글)을 즐기는 한 누리꾼과 선정적인 인터넷 뉴스사의 합작품이었다.

문제의 인용 기사를 가장 먼저 세상에 공개한 매체는 〈TV 리포트〉라는 인터넷 뉴스사다. 이 매체의 ㅈ 인턴 기자는 6월20일 오후 7시25분에 해당 기사를 작성했고, 이후 6시간이 지난 6월21일 오전 1시쯤 한 방송사가 비슷한 내용을 인용 보도하면서 언론계 전체에 확산됐다.
 

〈풋발 인터내셔널〉(위)은 올해 히딩크를 인터뷰한적이 없다고 밝혔다.

최초로 기사를 쓴 〈TV 리포트〉 인턴 기자에게 인용문의 출처를 물었다. 그 인턴 기자는 “직접 외신을 본 적은 없다. 다만 ‘아이 러브 사커’라는 축구 동호회의 한 누리꾼에게 제보를 받았다. 그 누리꾼이 카페에서 지명도가 있는 사람이어서 신뢰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제보자 역시 네덜란드어 원문을 보내지는 않았다고 했다.

‘아이 러브 사커’ 동호회 게시물을 보면 6월20일 오전 9시48분에 관련 게시물이 올라 있다. 하지만 이 게시물은 ‘사커라인’이라는 다른 동호회 게시물을 옮겨온 것이다.

사커라인 동호회 게시판에 6월20일 오전 9시2분 해당 글을 쓴 사람은 ㅋ씨였다. ㅋ씨는 “실은 나도 다른 축구 동호회 ‘○○월드’ 게시판 글을 베껴 쓴 것이다. 카피하면서 출처를 밝히지 않은 점은 내가 잘못했다”라고 말했다.

원문 확인 없는 베껴쓰기 관행

〈시사IN〉이 추적해본 범위 안에서 이 번역문이 가장 먼저 세상에 공개된 것은 축구 동호회 ‘○○월드’였다. 이 동호회 회원 ‘○××××××××’씨는 6월20일 오전 8시44분에 “히딩크는 6월18일 네덜란드 축구 전문지 ‘풋볼 인터내셔날’과의 한국과 아르헨티나전 평가 질문에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차후 기사화되겠지만 간략하게 내용을 정리했습니다”라며 문제의 인터뷰를 소개하고 있다. 인터뷰는 27줄에 달하는 번역문으로 언론에 등장한 문장과 똑같았다.

이 누리꾼 역시 다른 곳에 올라온 글을 베껴 적었을 가능성도 있지만, 이 글에는 다른 곳에서 옮겨왔다는 출처 표시가 없다. 〈시사IN〉이 이 누리꾼에게 출처를 물었지만 아직 답을 하지 않고 있다.

정리하면 이렇다. 6월20일 아침 8시44분 이전에 한 누리꾼이 축구 동호회를 중심으로 수상한 외신 번역문을 올렸다. 이 글이 여러 스포츠 게시판과 인터넷 공간에 퍼졌고 이를 보고 인터넷 뉴스사가 기사를 썼고 포털 메인에 올랐다. 이후 유력 매체도 덩달아 베껴쓰기를 하면서 오보가 퍼진 것이다.

유력 언론이 오로지 〈TV 리포트〉를 베낀 것인지, 아니면 비슷한 누리꾼 제보에 제각각 속아넘어간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 다만, 외신 기사 인용 보도의 경우 한 언론사가 먼저 기사를 쓰면 다른 언론사는 원문 확인 없이 따라 베껴쓰는 관행이 있는 게 사실이다.

외신을 사칭해 기사를 조작 인용하는 것은 가수·연예인 동호회 게시판에서 흔히 있는 ‘낚시’(속임수를 뜻하는 은어)라고 한다. 월드컵 기간 크고 작은 ‘낚시 기사’ 파문이 스포츠 동호회 게시판에 나돌았다. 예를 들어 마라도나 감독을 인터뷰한 기사를 복사(퍼오기)하면서 슬쩍 가짜 문장을 삽입하는 방식으로 인터뷰를 조작하는 것이다.

‘가짜 인터뷰 기사 소동’의 책임을 오로지 누리꾼에게만 묻는 것도 적당치 않아 보인다. 인터넷에 가짜 글이 범람하는 것은 세계 어디나 마찬가지지만, 유력 매체가 기사를 쓰기 전에 원문을 확인하는 것으로 얼마든지 거를 수 있기 때문이다.

6월21일 〈시사IN〉이 네덜란드 현지 확인을 통해 오보를 확인하고 〈시사IN Live〉에 첫 온라인 기사를 쓴 이후 국내 언론은 일제히 정정 보도를 시작했다. 몇몇 언론은 〈시사IN〉이 한 것과 마찬가지 방법으로 네덜란드에 확인을 해보았고, 〈시사IN〉 기사를 인용해 오보 소동을 전하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현지 확인도 하지 않고 〈시사IN〉을 인용하지도 않은 채 ‘히딩크 야구 발언은 거짓’이라고 보도한 매체도 있었다. 언론의 베껴쓰기 관행을 비판하는 기사를 두고 또 베껴쓰기를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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