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처음에는 이게 왜 얘깃거리가 되나 싶었다. ‘스웨덴에서는 밥때가 되어도 손님에게 밥을 주지 않는다더라’는 내용의 글이 2주째 국경을 초월해 전 세계 인터넷을 달구고 있다. 비(非)스웨덴인들의 경악, 스웨덴인들의 인정과 변명, 양쪽에서 한발 물러선 사람들의 ‘그게 왜 문제냐’라는 의아한 반응까지, 논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여러 소셜미디어를 넘나들며 퍼졌다. 신문, TV 등 일반 미디어도 이 흐름에 올라타 다양한 분석을 내놓는 중이다. 한국의 소셜미디어에서는 ‘스웨덴에서는 손님에게 밥을 안 준다더라’는 식으로 알려졌지만, 정확히 말하면 ‘스웨덴에서는 집에 놀러온 아이 친구에게 밥을 안 준다더라’는 것이 현재 문제가 되는 내용이다. ‘스웨덴게이트(Swedengate)’로 명명된 이 현상의 전말을 살펴보자.
시작은 미국의 정보 공유 소셜 커뮤니티인 레딧(Reddit)의 한 댓글이다. 5월26일 레딧에 이런 질문이 올라왔다. “당신이 다른 사람의 집에서 문화나 종교의 차이 때문에 해야 했던 가장 이상한 일이 뭔가요?” 여기에 달린 약 1만6500개 댓글 중 하나가 다음과 같았다. “스웨덴 친구 집에 갔던 일이 떠오르네요. 친구 방에서 놀고 있는데, 걔 엄마가 저녁이 준비됐다고 부르더라고요. 그러자 친구가 나에게 가족들이 밥 먹는 동안 자기 방에서 ‘기다리라고’ 말했어요(작은따옴표는 댓글 작성자가 대문자로 쓴 부분).” 레딧은 규모가 큰 커뮤니티이지만 다른 소셜미디어에 비해 회원들을 중심으로 폐쇄적으로 운영되는 편이다. 찻잔 속 소용돌이만 일으키고 끝날 뻔했던 이 댓글은, 한 레딧 이용자가 캡처해 트위터로 옮기면서 폭풍의 눈이 된다. 이 이용자(트위터 아이디 @SamQari)는 댓글 캡처본을 공유하며 이렇게 썼다. “내가 재단을 하려는 건 아니지만 이해가 안 된다. 친구에게 밥도 안 주면서 어떻게 자기가 밥을 먹는다는 거지?” 5월26일에 올라온 이 트윗은 2주도 안 되어 2만4000회 이상 리트윗, 3만 회 이상 인용 트윗되었고, 14만 건 넘는 ‘좋아요’를 받았다(48쪽 사진 참조).
그 과정에서 ‘내가 스웨덴 친구 집에 가봐서 아는데’로 시작하는 수많은 경험담이 공유됐다. 당사자 격인 스웨덴인 상당수도 ‘틀린 얘기는 아니다’라고 인정했다. 스웨덴 출신의 유명 가수인 사라 라르손도 합세했다. 라르손은 트위터에 “친구 집에 놀러갔는데 (식사 시간에) 친구 방에 내버려두거나 ‘2분 거리에 사니까 너희 집에 가서 밥 먹어’라고 하는 게 드문 일은 아니었다. 이상하지만 사실이다”라고 썼다. 스웨덴 작가 린다 요한손은 조금 다른 반응을 보였다. 그가 영국 미디어 〈인디펜던트〉에 기고한 글의 제목은 “나는 스웨덴인이다-우리가 손님들에게 음식을 대접하지 않는 건 사실이다. 뭐가 문제인가?”이다. 영국에 16년째 살고 있는 요한손이 스웨덴과 영국의 문화를 비교하는 말을 들어보자. “스웨덴인들은 집에 놀러온 아이(혹은 아이의 가족)에게 저녁 식사 계획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그리고 그 집의 일과를 망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한다. 아이 친구에게 밥을 먹이기 싫다거나 돈 드는 걸 걱정하는 게 아니다. 그보다는 전통에 따라, 그리고 자기 가족과 저녁을 먹고 싶다는 생각 때문에 그러는 것이다. 스웨덴은 영국보다 더 자유로운 사회다. 아이들이 마음대로 뛰어다니다 친구네 문을 두드리고 들어가 놀 수 있다. 계획을 하지 않았으니 저녁 먹을 시간에 다른 집 아이들이 몇 명이나 있을지 알 수 없다(〈인디펜던트〉 기고문 중).” 미리 알았다면 몰라도, 계획 없이 집에 와서 노는 아이들에게까지 밥을 먹일 수는 없다는 의미다.
8세기 바이킹까지 소환된 ‘스웨덴게이트’
미국 일간지 〈워싱턴포스트〉는 스웨덴게이트의 진실을 파악하기 위해 전문가를 불러온다. 식품 역사학자인 스웨덴 농업과학대학 리샤르드 텔스트룀 교수가 〈워싱턴포스트〉와 한 인터뷰에서 밝힌 내용에 따르면, 1990년대까지는 아이들이 친구 집에서 밥을 먹지 않는 것이 드문 일이 아니었다고 한다. “식사는 집에서 하는 거였죠. 다른 사람의 아이들에게 밥을 먹이는 건 그 가족의 삶에 간섭하는 것으로 여겨질 수도 있었습니다. ‘당신이 당신 자식을 제대로 못 먹이니 내가 먹인다’는, 숨은 의미가 있는 행동인 거죠.” 즉 집에 놀러온 아이의 친구에게 밥을 주지 않는 건 스웨덴인들이 무례하거나 차가워서가 아니라 반대로 다른 가족을 존중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스위스 베른의 지역 일간지 〈베르너차이퉁〉은 스웨덴게이트를 다루면서 과거 8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스웨덴인의 조상인 바이킹에게는 다른 사람에게 초대를 받아 식사하는 것을 빚지는 행위로 여기고 나중에 이를 갚는 관습이 있었는데 그것이 지금까지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고 한다.
유럽 전체 이슈를 다루는 온라인 매체 〈유로뉴스〉는 이 현상의 이면에 다른 원인이 있다고 지적한다. 기사는 “스웨덴게이트는 확실히 깨끗하던 스웨덴의 명성을 갉아먹었다. 광범위한 논쟁을 촉발시킴으로써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판도라의 상자에 뭐가 들었냐는 것이 핵심인데, 기사는 스웨덴의 유색인종과 이민자에 대한 차별 대우, 과거 식민주의, 그리고 코로나19 당시 세계적으로 논란이 되었던 스웨덴의 자유방임주의적 대응책을 언급한다. 스웨덴인이 가족 외의 사람에게 밥을 주지 않는다는 건 사실 스웨덴의 배타적 문화, (전염병에 취약한) 노인에 대한 무배려 등과 연관 지을 수 있다는 뜻이다. 스웨덴게이트 기사에 달린 댓글 중에도 이런 내용들이 있었다며, 이 기사는 “스웨덴의 유색인종과 이민자 후손들이 스웨덴게이트 해시태그를 이용해 그들이 스웨덴에서 환영받지 못하고 차별당한 경험을 공유하고 있다”라고 전했다. 손님 대접 문화는 북유럽 어디서나 비슷한데 왜 유독 스웨덴이 집중적으로 이슈가 되는지를 묻는다면 이것이 대답이 될 수도 있겠다.

이상은 스웨덴게이트 이후 나온 수많은 미디어 보도 중 극히 일부다. 소셜미디어에 공유된 개인들의 분석까지 포함하면 ‘스웨덴인들이 집에 놀러온 아이 친구에게 밥을 안 주는 이유’를 백 가지도 넘게 꼽을 수 있을 듯하다. 한편 ‘나는 스웨덴인 집에 놀러가서 잘 얻어먹었는데 무슨 소리냐’는, 소수의 반대 경험도 눈에 띈다. 의견의 홍수 속에서 내가 정말로 궁금한 것은 스웨덴인이 집에 온 손님에게 밥을 주는지 안 주는지가 아니다. 우리가 다른 문화권의 현상을 대할 때 얼마나 쉽게 일반화, 혹은 반대로 확대 해석을 하는지,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우리의 세계관에 영향을 미치는지다.
다문화 사회에 필요한 한 문장 ‘예외가 있다’
나도 직접 겪은 일이 있다. 스위스는 인구의 4분의 1이 외국인인 나라라 유럽 각국의 문화를 접하기가 쉽다. 지금까지 식사 시간에 다른 집에 갔다가 함께 밥을 먹지 않고 돌아온 경우는 딱 한 번 있었는데, 프랑스 가정이었다. 아이들과 놀이터에서 놀고 있던 중, 프랑스인 아빠가 저녁 시간이 가까워오니 자기 집에 가서 맥주나 한잔하자기에 저녁까지 먹자는 뜻인 줄 알았다. 그 집 거실에서 맥주를 마시고 있는데, 갑자기 발코니에 나가 고기를 굽더니 본인과 딸만 먹기 시작하는 게 아닌가. 빈속에 맥주만 들이붓고 있던 나와 남편은 그제야 상황을 파악하고 얼른 아이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반대의 경우도 있다. 어느 일요일에 스웨덴 가족과 다 같이 강가에서 놀다 점심때가 됐다. 원래 점심까지 먹기로 계획한 것은 아니었는데 마침 그 가족의 집이 근처였다. 스웨덴 부부는 우리가 사양하는데도 일단 자기네 집으로 가자고 했다. 그러더니 우리를 앉혀놓고 일요일에도 문을 여는 먼 곳의 마트까지 가서 소시지를 사와 점심을 마련했다. 내가 이 일들을 근거로 프랑스인은 손님을 굶기고 스웨덴인은 손님을 정성스레 대접한다고 말해도 될까. 다행인지 불행인지 내게는 다른 경험들도 있다. 이 프랑스인과 스웨덴인의 행동이 예외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경험들이.
‘사람마다 다 다르다’거나 ‘케이스 바이 케이스’ 같은 얘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경험의 양이 늘어나다 보면 어슴푸레하나마 트렌드가 보인다. 스웨덴게이트를 계기로 전 세계 각국의 사람들이 손님을 대접하는 문화에 대해 내놓고 있는 이야기들, 즉 북유럽 사람들은 인색하고 남유럽이나 남미, 동남아 사람들은 손님을 후하게 대접한다는 주장은 얼추 맞다. 특수한 상황에서 색다른 경험들을 할 수는 있지만, 한 번의 경험 때문에 흐름을 무시해버리면 곤란하다. 모든 개인은 다 다르다는 식의 극단적 상대주의는 간편한 일반화 못지않게 게으른 태도다. 사람은 가족과 친구로부터, 교육과 경험으로부터, 역사와 환경으로부터 영향을 받는 존재다. 맥락을 무시한 뒤 남는 것은 공평무사한 세계관이 아니라 파편적으로 흩어진 정보의 조각일 뿐이다.
그러면 어쩌라는 것인가. 성급한 일반화도, 상대주의도 안 된다니. 다문화 사회의 일원으로서 나는 마음에 간단한 한 문장을 품고 산다. ‘예외가 있다.’ 이곳에서 만나는 다양한 사람들은 대개 그들이 속한 집단의 특성을 어느 정도 반영한다. 하지만 그 개인이 집단의 트렌드에서 벗어나 있을 가능성도 늘 존재한다. 나는 치즈를 전혀 먹지 않는 스위스인을 알고 있다. 이 사실이 수많은 스위스인의 치즈 사랑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내가 프랑스인에게 저녁 대접을 한 번 못 받은 건 사실이지만 그 때문에 프랑스인을 모두 차갑고 인정 없는 사람들로 본다면 내가 구축한 좁은 세계에 스스로를 가두는 꼴이 아니겠나. 가능성으로 존재하는 예외는 어떨 때는 희망적인, 어떨 때는 실망스러운 모습으로 나타난다. 두 경우의 수를 모두 염두에 두는 것이 다문화 사회를 살아가는 데 필요한 태도일 것이라 생각한다.
마침 이 글을 쓰기 하루 전날 한국인-스웨덴인 부부를 만났다. 스웨덴 남성 D에게 스웨덴게이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으니 웃음을 터뜨렸다. “우리 세대가(그는 31세다) 집에 온 아이에게 밥을 안 주는 일은 없을 것 같고, 아마 윗세대까지 남아 있는 관습인 것 같아요. 그리고 뭐, 밥을 준다고 해도 놀러온 아이가 싫다고 할 수도 있는 것 아닌가요?” 별로 개의치 않는 듯한 대답이었다. 그에게 다시 물었다. 한국인 아내와 결혼한 뒤 문화 차이라고 느끼는 것이 무엇이냐고. D가 말했다. “분명 처음에는 문화 차이가 있었어요. 그런데 서로 맞추려 하다 보니 지금은 차이라고 할 게 사라졌어요. 처음에 느꼈던 문화 차이가 뭐였는지도 다 잊어버렸다니까요.” 그의 대답은 ‘예외가 있다’보다 한 수 위였다. 서로 맞추려 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실망의 가능성을 잘라낼 유일한 길이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