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 10월15일 김대중 당시 평화민주당 총재가 지방선거 실시를 요구하며 13일간 단식한 끝에 병원에 입원했다.ⓒ연합뉴스

가수 정태춘씨의 노래 ‘92년 장마, 종로에서’는 내 애청곡이다. ‘다시는 종로에서 깃발 군중을 기다리지 마라/ 기자들을 기다리지 마라/ (중략) / 다시는 시청 광장에서 눈물을 흘리지 말자/ 물대포에 쓰러지지도 말자.’ 가사에서 1991년 5월 이후의 기억이 떠오른다.

1991년 봄, 명지대 학생 강경대의 죽음 이후 열 명이 더 숨졌다. 시위가 격화했고, 최루액을 섞은 물대포가 쏟아졌다. ‘유서 대필 조작 사건’이 있었고, 국무총리 서리가 외대에서 밀가루 세례를 받았다. 수세에 몰린 정부·여당이 공세에 나섰다. 그리고 6월에 지방선거가 있었다. 그 선거에서 집권 여당은 전체 866석 중 564석을 차지했다. 거리의 죽음과 여당의 승리. 허탈했다. 정태춘의 노래에 그 시기의 회한이 담겨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흔히 지방선거가 1995년 시작한 걸로 안다. 지방자치단체장과 지방의원을 동시에 선출한 건 그때가 맞다. 그러나 지방선거가 ‘부활’한 것은 1991년이다. 지방선거를 치르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다. 이승만 정권은 정권의 유불리에 따라 지방자치제를 이용했다. 단체장 선거를 미루기도 하고, 선거 시기마저 오락가락했다. 4·19 혁명 이후에 자치단체장과 지방의회 의원을 선거로 뽑는 제도가 마련되었으나, 박정희의 5·16 군사 쿠데타로 중단되었다. 박정희 정권은 유신헌법에 이런 조항을 넣기도 했다. ‘지방의회는 조국 통일이 이루어질 때까지 구성하지 아니한다.’ 조국 통일과 지방의회 구성이 무슨 상관인가? 그런 시절이었다.

군사독재정권에 의해 중단된 지방자치제가 다시 시작된 것은 1987년 6월 항쟁 덕분이었다. 정권은 민주화의 열기에 밀려 지방자치 실시를 약속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1990년 3당 합당으로 탄생한 민주자유당은 또다시 지방선거를 연기하려 했다. 당시 평화민주당 김대중 총재가 13일간 단식을 한 끝에 지방선거를 실시할 수 있게 되었고, 그게 1991년 3월 기초의회 선거, 6월 광역의회 선거였다.

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가 끝났다. 더불어민주당·정의당은 패배의 후폭풍이 만만치 않을 듯하다. 승패보다 눈에 띄는 건 투표자 수이다. 이번 지방선거에는 2256만명이 투표했다. 4년 전 지방선거 때보다 투표자 수가 326만명 적다. 지난 대선과 단순 비교하면, 1150만명이 투표장으로 향하지 않았다. 이 거대한 무응답은 무엇을 뜻할까? 패배 원인 분석은 여기에서부터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선거 승패보다 중요한 게 선거 이후의 ‘뒤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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