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변의 식물은 죽은 나무를 파고들고 감싼다. 죽은 나무를 타고 올라간 담쟁이덩굴의 잎. ⓒ안희제 제공

레몬 나무의 가지들은 약간 힘을 주면 미세한 먼지가 날리며 건조한 단면이 드러났다. 살아 있을 때처럼 탄성이 있는지 확인하다 보니 남은 가지가 없었다. 그런데 죽은 줄 알았던 레몬 나무에서 연하고 얇은 잎들이 새로 나고 있다. 레몬 잎은 그렇게 작아도 향이 강해서, 살짝만 만져도 손에 레몬 껍질 향이 가득해진다. 비를 잔뜩 맞고 죽은 줄 알았던 아보카도 싹에서도 푸릇푸릇한 잎이 난다.

앙상한 가로수에서도 싹이 돋아난다. 그걸 보고 있으면 아직 살아 있구나 싶어 마음이 놓이는 한편, 이런 식으로 가지치기를 당하다가는 언제 나무가 명을 다할지 알 수 없어 언제 올지 모르는 이별을 미리 걱정하기도 한다. 간판을 가린다고, 때로는 별다른 이유도 없이 관습적으로 가로수의 가지를 자르는 사회에서도 싹은 돋아난다. 넓고 둥근 단면들 근처에서 나오는 손가락 굵기의 가느다란 가지들.

무분별한 가지치기의 영향은 나무 크기나 종류에 따라 몇 년 후에 나타나기도 해서 나무가 죽는다고 해도 누구 책임인지 알기 어렵다. 그러나 책임 소재가 불분명하다는 것은 동시에 죽은 나무와 이웃하는 모두가 인간과 식물 사이의 관계를 성찰해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한 나무의 죽음은 한 개체 차원을 넘어서 수많은 존재들과 연결된다. 죽은 나무는 그저 사라지지 않고 도시에 흔적을 남긴다.

신호등과 딱 붙어 있던 동네 나무는 언젠가 며칠에 걸쳐 완전히 잘려 나갔다. 처음에는 가지가 다 사라졌고, 그다음에는 줄기가 절반쯤 잘렸으며, 나중에는 밑동만 남더니, 그 주변에 풀을 가득 심어서 이제는 밑동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그 나무는 죽지 않았다.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 밑동과 우리가 온전히 뽑아낼 수 없는 뿌리에는 여전히 주변 풀들이 연결되어 있고, 밑동은 수많은 벌레의 집이 되었다.

차 서너 대를 주차할 임시 공간 때문에 잘려 나간 벚나무들도 죽지 않았다. 잘려 나간 자리에는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차를 댈 수 없도록 울타리가 쳐졌다. 벚나무가 있던, 차들이 서던 자리에는 다시 풀이 심어졌다. 일정한 간격을 두고 심어진 그 풀들에서는 뿌리가 뻗고, 그 뿌리는 벚나무가 남긴 뿌리에 닿을 것이다. 그리고 이곳에는 다시 벌레와 이름 모를 식물들이 찾아올 것이다.

당연히 살아 있다고 생각한 나무를 어느 날 자세히 보니 잎이 하나도 없었다. 계절이 몇 번 지나도 잎은 돋아나지 않았다. 내가 그 나무의 잎이라고 생각한 건 저 아래 땅에서부터 그 나무의 끝까지, 건물 4층 높이는 족히 될 그 나무의 꼭대기까지 타고 올라간 담쟁이덩굴의 잎이었다. 하얗고 날개가 넓은 새들은 그 가지의 끝에 서서 개울을 내려다보곤 한다. 내가 그 나무를 살아 있다고 생각한 건, 사실 그 죽은 나무가 아직 죽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주변의 식물들은 죽은 나무를 파고들고 감싼다. 죽기 전에도 뿌리와 가지가 주변과 엉켜 있던 나무의 경계는 더욱 흐려진다. 하나의 나무는 하나의 나무가 아니다. 담쟁이와 벌레와 이름 모를 풀들과 죽은 나무와 그 옆의 나무들은 분리되지 않는다. 그 깊은 생태계에서 삶과 죽음은 서로를 지탱한다. 죽은 줄 알았던 나무는 기다림 속에서 싹을 틔우기도 하고, 죽은 나무는 수많은 연결 안에서 삶의 한 축이 된다. 죽은 나무는 죽지 않는다. 죽은 나무는 살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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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마음 첫 다짐 잊지 않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