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피스와 전국금속노동조합 주관으로 4월14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기후위기 대응 위한 자동차 산업의 정의로운 전환 정책 추진 촉구 기자회견'이 열렸다.ⓒ국회사진기자단

우리는 여태껏 겪어보지 못한 다른 세상의 들머리에 들어섰다. 기후위기가 바꿔놓는 세상 이야기다. 유엔이 정한 ‘생물종 다양성 보존의 날’인 5월22일, 노고단에서 선 채로 죽어가는 구상나무 앞에 조그맣게 모였다. 지리산 시인 이원규씨는 “이제 가망이 없다”라는 말로 인사말을 대신했다. 그는 1998년 봄, 전라선 야간열차를 타고 구례구역에 내렸다.

“기후위기로 지구가 ‘불타는 집’으로 바뀌는 이 순간, 모두 어찌할 바를 몰라 발만 동동 구르는 이때(이원규 시인)” “노동조합은 어디에 있을까?”가 모임 내내 나를 붙잡은 질문이었다. 노동자는 ‘먹고 입으며 탄소를 만드는’ 소비자일 뿐 아니라 노동의 이름으로 ‘탄소를 배출하는’ 생산자다. 한편 조직된 노동은 우리 사회 최대의 풀뿌리조직이다. 이처럼 노동은 문제의 근원이지만 노동이 나서지 않으면 탄소 중립도, 생물종 다양성도 운동의 중심을 잃고 만다.

5월18일 한국노동연구원과 독일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재단이 ‘정의로운 전환:한국과 독일의 경험’이라는 주제로 세미나를 열었다. 기후위기 앞에서 노동의 역할을 되짚어보는 모임이었다. 한국의 노동조합이 발신하는 희망의 메시지는 없었다. 정의로운 전환을 말했지만 ‘정의’는 조합원의 일자리로 제한됐고, ‘전환’은 구조조정 대응을 넘지 못했다. 그마저 기후위기의 영향을 받는 일부 업종의 노동조합이나 관심을 기울일 뿐이다.

한국의 노동조합이 기후위기에 대응하는 데 불리한 것은 사실이다. 무엇보다도 노동조합이 기업별로 쪼개지듯 조직되어 있다. 그러다 보니 사고의 지평도 기업 담벼락에 갇히고 대응 전선도 모래알처럼 흩어진다. 조직률이 낮은 데다 조직된 노동자의 대부분은 정규직이다. 조직되지 않은 하청 노동자나 비정규 노동자들은 목소리조차 내지 못한 채 전환의 비용을 고스란히 부담하는 처지로 내몰린다.

노동조합의 참여 통로가 열려 있는 것도 아니다. 단체교섭은 임금과 근로조건에 머물고 경영 참여는 공동 결정의 흉내만 낸다. 사회적 대화가 그나마 노동자가 정책에 접근하는 통로이지만 잊힌 지 오래, 제 이름값도 하지 못한다. 법(탄소중립법)까지도 정의로운 전환을 내세우지만 정부는 의사결정 과정에서 노동자에게 자리를 내줄 생각이 아예 없는 듯하다.

노동조합은 정책결정 과정에서 배제되고 사회적으로 고립된다. 자본과 ‘담합’하여 탄소를 생산하는 기후위기 주범으로 매도되기도 한다. 때가 오면 자본으로부터 버림받겠지만 말이다. 기후위기가 노동의 위기로 전환되는 것이다. 1.5°C의 마지막 경고는 잦아지는 기후 재난과 깊어지는 양극화를 통해 인류의 생존을 시험할 것이다.

노동조합 나서야 사회의 흐름 바뀌어

하지만 이게 이야기의 끝은 아니다. 묵정밭에도 바람은 분다. 금속노조와 그린피스가 자동차산업의 기후대응을 함께 연구하고 지난 4월에는 토론회도 열었다. 금속노조는 사용자단체와 산업전환 협약을 맺기도 했다. 여기에는 고용안정과 양질의 일자리 확보 이외에 기후위기 대응도 들어 있다. 발전소 노조들도 정의로운 에너지 전환을 내걸고 환경단체 및 학계와 연대하고 있다.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은 기후위기 대응 특별결의안을 채택하거나 기후노동네트워크를 구성했다.

끄지 못한 지구의 불이, 구상나무처럼 죽어가는 생명이 우리 사회의 체제 전환을 요구할 때, 노동조합도 자신의 존재를 조금씩 확인해가고 있다. 아직은 수줍은 듯 어린 싹이지만 기후위기에 시달리다 보면 대응전략도 크고 실해질 것이다. 그게 노동조합의 쓰임새이자 존재 이유다. “녹색 노동조합은 가능하다(김현우)”라고 믿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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