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영 그림

‘동물(animal)’이란 단어는 숨결 또는 생명이라는 뜻의 라틴어 ‘아니마(anima)’에서 유래했다. 이 말을 만든 고대 로마인들은 동물이 인간과 똑같은 생명체라는 것을 의심치 않았던 것이다. 로마보다 더 오래된 그리스 문명에서도 인간과 동물은 일체였다. 그리스 신들은 흔히 동물의 형상을 띠고 있었다. 서구뿐 아니라 지구상의 모든 신화에는 자신들의 기원인 동물 조상(totem)이 있다. 힌두와 불교같이 윤회설을 믿는 종교에서는 사후에 인간의 영혼이 동물의 몸 안에 깃든다고 했으니 인간과 동물의 경계는 더욱 희미할 수밖에 없다. 윤회설 속에서는 내가 먹거나 학대한 동물이 나의 부모이거나 가족일 수 있고 친구일 수 있다. 불교가 살생을 금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다.

일신교에서는 동물을 숭배하지 않았지만, 기독교에서 통용되는 ‘하느님의 어린양’이라는 말은 기독교에서조차 동물에게 존엄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단서로 보인다. 하지만 창세기 1장 28절에 공표되어 있듯이, 유대-기독교 전승에서 신은 인간에게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고 했지 공존하라고 말하지 않았다. 기독교 신학자나 사상가들 가운데 동물과 우정을 맺으려고 했던 사례는 아주 드물다.

데카르트가 유신론자였는지 무신론자였는지는 지금껏 논란거리다. 분명한 것은 청소년 시절의 약 8년 동안을 예수회 부설 학교에서 공부했던 사실이 그의 동물관에 큰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몇몇 기록에 따르면 그는 동물에게 의식적 자각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고양이를 창밖으로 던졌고, 겁에 질린 고양이의 울음소리가 기계적 반응일 뿐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가 한 실험 가운데는 바이올린이 연주되는 동안 개를 채찍질하면 나중에 바이올린 소리가 개를 겁먹게 하는지를 알아보는 것도 있었다. 파블로프의 실험과 유사한 이 실험 역시 동물은 기계라는 이론을 입증하기 위함이었다. 그는 동물의 영혼을 인정하지 않는 기독교의 통설을 의심하지 않았고, 그것을 자신의 합리주의 철학에서 재차 강조했다.

동물해방 운동이 공식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날은 파리 유네스코 본부에서 세계동물권리선언이 발표된 1978년 10월15일이다. 그러나 조직화되지 않았을 뿐 동물해방 사상은 그보다 더 오래되었다. 이 분야의 선구자로 단연 눈에 띄는 철학자는 쇼펜하우어다. 불교철학의 눈으로 서양철학을 해체한 그는 동물의 불행에 유대-기독교가 있다고 말한 최초의 서양철학자이자, 인류의 원조는 아프리카인처럼 검거나 갈색이었으며 백인종은 거기서부터 변색한 변종이라고 주장한 반(反)인종차별주의자였다. 아래는 〈쇼펜하우어의 행복론과 인생론〉(을유문화사, 2013) 곳곳에 나온 문장을 모은 것이다.

‘동물보호’에서 ‘반종차별주의’까지

“동물은 모든 자연스러운 활동을 우리와 공통으로 지니고 있다. 먹고 마시기, 임신, 출생, 죽음 등에서 보듯이 우리의 본성과 동물의 본성은 동일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동물은 우리가 사용하기 위한 제품이 아니다. 진리는 바로 동물이 주된 점에서 그리고 본질적으로 우리 자신과 완전히 같은 존재이고, 그 차이란 단순히 지성의 정도, 즉 뇌의 활동에 있을 뿐이라는 사실이다. 그런 간단하고 고상한 진리가 대중의 마음속에 파고들어야 동물은 더 이상 권리 없는 존재로 살아가지 않고, 거친 악동의 나쁜 기분이나 잔혹성에 내맡겨지지 않을 것이다. 이런 사실을 오인하려면 사람들에게 오감이 없어지거나 보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 쇼펜하우어는 과학 발전이나 인간의 이익을 위해 동물을 희생시키는 동물실험을 중단하라고 촉구했다.

어느 필자에 따르면 20세기 인문학계에서 세 가지 사상이 우리 세계를 긍정적인 방향으로 끌어갔다고 한다. 첫째, 하나의 진리에 대한 믿음은 필연적으로 맹목적 오만을 낳고 위험한 결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고 말한 이사야 벌린의 다원주의. 둘째, 공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인간 각자의 능력(행운)을 ‘무지의 베일(veil of ignorance)’로 가려야 한다는 존 롤스의 정의론. 끝으로 동물에게도 권리가 있다는 피터 싱어의 동물해방 사상.

가장 낮은 수준인 동물보호에서부터 시작한 동물해방 운동은 현재 동물권리 운동을 거쳐 반(反)종차별주의로 진화했다. 딱히 정해진 공식은 아니지만, 동물학대 금지→동물보호→동물복지 단계까지를 동물보호라고 할 수 있다. 동물보다 우위에 있는 인간이 동물에게 시혜를 베푸는 것이 동물보호라면, 동물권리 운동은 동물의 권리를 인정하는 것이어서 차원이 다르다. 즉 인간에게 인권이 있듯이 동물에게도 그것과 똑같은 권리를 부여하는 것이다. 이것만 해도 획기적인데 다시 반종차별주의가 도입된 이유는 동물권리 운동만으로는 인간과 동물 사이의 종 차별을 없애지 못한다고 생각해서다. 이뿐 아니라, 반종차별주의자들이 날카롭게 파고든 지점 가운데 하나는, 왜 개와 고양이는 집안에서 키우면서 아프면 병원에 데리고 가는데, 돼지·소·닭은 고기가 되기 위해 사육되어야 하는가라는 것이다.

동물권과 반종차별주의가 서양의 특허 같지만 고려 시대의 문신 이규보의 ‘슬견설(蝨犬說)’을 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 어느 나그네가 이규보에게 “어제 저녁에 어떤 사람이 큰 몽둥이로 개를 쳐서 죽이는데, 너무 참혹하여 마음이 아팠습니다. 이제부터는 맹세코 개나 돼지의 고기를 먹지 않기로 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이규보는 “어떤 사람이 이를 잡아서 화로에 넣어 태워 죽이는 것을 보고, 나는 마음이 아파서 다시는 이를 잡지 않기로 맹세했습니다”라고 응대했다. 나그네는 화를 냈다. “이는 미물이 아닙니까? 나는 크고 육중한 짐승이 죽는 것을 불쌍히 여겼는데, 당신은 이를 예로 들었으니 나를 놀리는 것이군요.” 이규보가 다시 대답했다. “피와 기운이 있는 것은 사람으로부터 소·말·돼지·양·벌레·개미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살기를 원하고 죽기를 싫어합니다. 그런즉 개와 이의 죽음은 같은 것입니다. 당신의 열 손가락을 깨물어보십시오. 엄지손가락만 아프고 나머지는 아프지 않습니까? 각기 기운과 숨을 받은 자로서 어찌 저놈은 죽음을 싫어하고 이놈은 좋아하겠습니까?”

배성호·주수원의 〈지속가능한 세상에서 동물과 공존한다는 것〉(이상북스, 2022)은 청소년을 대상으로 쓰였으나 인간과 동물의 공존이 제기하는 폭넓고 다양한 문제점을 세세하게 짚어준다. 우리는 기초가 필요하다. 이 책을 읽고 나서 에므리크 카롱의 〈반종차별주의-인간, 동물, 자연의 새로운 관계 맺기〉(열린책들, 2022)를 읽어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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