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의 남북전쟁이 한창 치열하게 벌어지던 1862년 9월22일 링컨 대통령은 노예해방을 선언한다. 그런데 이 선언을 읽어 내려가다 보면 이런 대목에 이르게 돼. “적합한 조건을 갖춘 자는 미군에 입대해 각 요새, 진지 및 기타 부서와 모든 선박에 배치될 수 있음을 알린다. 정의 실현을 위한 확고한 믿음과 헌법에 의해 보증되며 군사적 필요에 따른 이 선언에 전능하신 하나님의 은총과 인류의 신중한 판단이 함께하기를 기원한다.”
미국의 남북전쟁은 애초에 ‘노예해방 전쟁’으로 시작된 게 아니었어. 링컨 대통령 개인은 노예제를 혐오했지만 “노예를 해방하지 않아야 연방을 지킬 수 있다면 그렇게 하겠다”라고 공언할 만큼 연방 수호에 모든 것을 걸었고, 연방을 탈퇴한 남부에 대한 응징이 곧 전쟁의 시작이었으니까. 하지만 북부의 압도적인 군사적·경제적 우위에도 불구하고 남군의 저항은 만만치 않았다. 링컨으로서는 남부의 경제적 기반인 노예제도를 뒤흔들고 북군의 힘을 강화할 획기적인 조치가 필요했던 거야. 그것이 노예해방 선언이었지.
여기에 호응한 사람 중 하나가 매사추세츠 주지사 존 앤드루였어. 열렬한 노예 폐지론자이면서 무장투쟁을 통해서라도 노예들을 해방시키겠다며 봉기를 일으킨 존 브라운을 옹호했던 그는 흑인 연대를 창설하기로 결심한다. 이에 따라 자유인이 된 지 오래였던 북부의 흑인 가문 자제부터 갓 도망쳐온 노예까지 전의에 불타는 흑인들로 구성된 매사추세츠 54연대가 창립된다. 그러나 현실의 벽은 만만치 않았지.
잠깐 오늘날로 돌아와보자. 인종차별이 야만적인 행위라는 교육을 받았고, 역사 속에서 인종차별의 피해자였던 한국인들조차 자기 동네의 이슬람 성원 공사 자체를 막으려고 발버둥 치던 모습을 기억하겠지. 하물며 노예제가 수백 년 동안 엄존했던 미국에서 시민들이 흔쾌히 ‘흑인 미군’을 수용했다면 그게 더 이상할 거야. 흑인 부대는 출발부터 “제대로 싸울 수나 있을까?” 하는 의심과 “검둥이들을 노예로 부려서는 안 되겠지만 우리와 동등할 수는 없다”라는 냉소에 시달려야 했어. 과감하게 연대를 창립한 존 앤드루 주지사 역시 54연대의 지휘관은 백인이 맡아야 한다는 조건을 수용해야 했지. 이때 앤드루는 “피부색에 대한 천박한 편견보다는 확고한 반노예제 신념을 가진 장교를 임명하기로(〈영화로 본 새로운 역사〉)” 결심한다. 그의 선택은 역시 투철한 노예해방론자였던 프랜시스 쇼의 아들 로버트 굴드 쇼 대령이었지.
당초 로버트 쇼 대령은 이 임무 맡기를 꺼려 했다고 해. 그가 싸워야 할 것은 남부의 군대만이 아니었으니까. 장구한 역사적 유산이던 인종차별의 벽에 맞서고, 그때껏 누구도 경험해보지 못했던 임무, 즉 흑인들을 훈련시켜 전투에 나서게 한다는 막중함을 이겨내야 했지. 1862년 12월 남부 연합 대통령 제퍼슨 데이비스가 선언한 바대로 흑인 병사와 그들을 지휘하는 백인 장교는 ‘비열한 반란 선동’을 이유로 체포되는 즉시 처형당할 것이라는 협박 또한 물리쳐야 했단다.
“흑인 주제에 무슨 전투”
54연대장으로 취임한 쇼 대령은 맹훈련을 거쳐 흑인 부대원들을 정예병으로 성장시켰고 보스턴 거리를 보무당당하게 행진하며 환호를 받는다. 하지만 그들은 남군에 앞서 차별의 그림자와 먼저 싸워야 했어. 쇼 대령이 앤드루 주지사에게 보낸 편지 중 일부야. “워싱턴에서 흑인 부대 봉급을 삭감한다는 지시를 받으셨을 줄 압니다. 이는 다른 부대와 나란히 함께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입대한 연대원들에게 중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제 의견으로는 봉급을 전액 지불하지 못한다면 퇴역시키는 게 맞습니다.”
참전 직후 그의 연대원들은 전투 현장이 아니라 노동 현장에 집중 투입됐다. “흑인 주제에 무슨 전투” 하는 편견의 소산이었지. 또 남군 근거지 소탕을 위해 남부 민간인 마을에 불을 지르고 약탈하라는 등의 잡스러운 임무를 맡았어. 쇼 대령은 또 한 번 분노한다. “약탈이나 화형은 우리 연대에 적합한 일이 아닙니다.” 그는 상관들에게 전투에 참가하게 해달라 졸랐고 점차 그 기회를 얻어나가지. 그건 전공을 탐하는 군인이어서도 아니고 노예주에 대한 복수심에 불타는 흑인 부대이기 때문도 아니었다. “인권이란 인간다운 삶을 살기 위해 ‘싸울 수 있는 권리’의 다른 이름(문학평론가 고봉준)”이라는 말처럼 그들의 전투는 인류를 오래도록 짓눌러온 노예제도의 불의와 잔혹함에 대한 도전이었고, 인종차별의 거대한 뿌리에 생채기라도 내고 싶은 용감한 의지였어.
마침내 54연대는 최고의, 하지만 최악의 기회를 맞는다. 남북전쟁 종전 때까지도 함락되지 않을 만큼 난공불락이었던 와그너 요새 공략 임무를 맡게 된 거지. 54연대의 전말을 담은 영화 〈영광의 깃발〉(원제는 〈글로리〉)에서 돌격 직전, 쇼 대령은 기자에게 편지를 맡기며 이 한마디를 남긴다. “내가 쓰러진다 해도… 여기서 본 것을 기억해주시오(If I should fall… remember what you see here).”
영화 속 명장면 가운데 하나. 뻔히 죽음으로 향하는 흑인들을 묵묵히 바라보던 백인 병사 중 하나가 우렁차게 소리를 지른다. “해치워라 54연대!(Give them hell, 54th!)” 곧이어 백인 병사들의 환호가 54연대를 뒤덮는다. 54연대는 용맹스럽게 와그너 요새를 향해 돌격하지만 패배했고 쇼 대령 역시 선봉에서 싸우다가 심장을 꿰뚫리고 말지. 쇼 대령은 발가벗겨진 채 흑인 병사들과 뒤섞여 묻힌다. 고급 장교의 시신은 돌려주는 게 당시 남군과 북군의 불문율이었지만 남군 장교는 시신 양도를 요청하러 온 북군 장교에게 이렇게 내뱉지. “검둥이들과 같이 묻었소.” 남군 장교로서는 쇼 대령을 모욕하고 싶었겠지만 쇼 대령의 아버지는 이렇게 말한다. “용감하고 헌신적인 병사들에게 둘러싸여 누워 있는 그곳이야말로 더 성스럽고 안락한 안식처가 아니겠는가.”
54연대의 분투 이후 약 20만명에 달하는 흑인이 참전했고 그중 4만여 명이 전사한다. 하지만 54연대의 분투로 군대 내에서의 흑백 차별이 사라진 것은 절대로 아니었다. 54연대는 쇼 대령의 전사 이후로도 제대로 된 봉급을 받지 못했어. 와그너 요새 전투에서 네 번이나 총탄을 맞으면서도 끝내 군기를 떨어뜨리지 않고 지켜낸 윌리엄 카니 상사는 무려 37년 뒤에야 겨우 의회 명예훈장을 받을 수 있었지. 노예제도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지만 알다시피 차별의 문제는 150년이 지난 지금도 언제든 덧날 수 있는 상처로 인류의 심장에 남아 있다.
역사에서 골리앗 같은 강적을 거뜬히 이기는 소년 다윗 같은 예는 드물다. 맥없이 쓰러져 ‘공중의 새들과 들짐승들의 밥’이 되는 경우가 훨씬 더 많고 일반적이었지. 하지만 누군가 다윗의 용기를 내지 않는다면, 그리고 골리앗처럼 거대한 세력과 맞서 싸우지 않는다면 우리가 역사를 돌아볼 까닭도 없었을 거야. 쇼 대령과 54연대의 흑인 병사들은 전투에서 이기지 못했지만 단단한 돌팔매를 던졌던 셈이야. 골리앗을 쓰러뜨리지는 못했으나 그 돌팔매 자국은 뚜렷이 남아 뒷사람들의 과녁이 되었지. 그들을 기억하기 바란다. 아울러 오늘날 우리 곁에서 우리 주변의 골리앗을 향해 싸우는 사람들은 없는지 살펴보기 바란다. 그들 역시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을 수도 있으니까. “내가 쓰러진다 해도, 여기서 본 걸 기억해주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