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집으로 뛰어 들어온 아버지는 미처 신발을 벗지 못했다. 어머니가 급히 밥상을 차렸다. 아들은 마루에 신문지를 폈다. “워커화라고 하죠, 발목까지 올라오는 딱딱한 신발 있잖아요. 아버지가 워커화 끈을 일일이 풀고 묶을 시간이 없어서 제가 펴드린 신문지 위에 발을 얹은 채로 식사를 하셨어요.” 정원영씨(53)가 기억하는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1980년 5월이었다.
당시 광주에서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가 점점 거세지자 전남도경(현 전라남도경찰청)은 인근 지역 경찰서에 동원 명령을 내렸다. 함평경찰서에서도 경찰 55명을 보냈다. 정원영씨의 아버지 고 정충길 경사(당시 39세)도 그중 한 명이었다. “아버지가 출동했다가 집으로 돌아오기를 반복하던 때였는데, 마지막에는 전남도청을 못 빠져나오고 며칠 동안 계속 경비를 섰다고 하더라고요.”
아버지가 마지막 근무를 하던 5월20일, 열두 살이던 정원영씨는 친구와 함께 냇가에 물고기를 잡으러 갔다가 시위대를 만났다. 사람들이 도로가에 서 있고 그 사이로 ‘전두환은 물러가라’ ‘김대중을 석방하라’ 등의 현수막을 건 버스가 지나갔다. 사람들은 시위대를 향해 박수를 치기도 하고, 그들로부터 공수부대의 만행을 듣고 치를 떨기도 했다. 낚싯대를 어깨에 멘 정씨는 그 사이를 지나 집으로 돌아왔다.
어머니는 집에 돌아온 정씨를 데리고 누군가의 집으로 향했다. 전남도청으로 동원된 또 다른 경찰관의 집이었다. 광주의 상황이 심각하다는 걸 파악한 가족들이 모여 걱정을 나누고 있던 참이었다. 그때 멀리서 헬리콥터 소리가 들렸다. “순간 사람들이 다 놀랐어요. 아니 함평에도 공수부대가 왔나? 이거 큰일났다, 다들 문도 닫고 창도 닫았어요. 경찰관 가족인데도 그렇게 위축될 수밖에 없었어요. 공수부대 이야기를 들었으니까요. 저는 그때까지만 해도 아버지의 죽음을 몰랐지만 이상하게 그 뒤로 헬리콥터 소리를 들으면 아버지의 죽음이 떠오르더라고요.” 정씨는 40대 때까지 헬리콥터 소리를 들으면 공황에 빠졌다.
그날 아버지의 소식은 들을 수 없었다. 집으로 돌아온 정씨는 이튿날을 기대하며 잠에 빠져들었다. 1980년 5월21일은 석가탄신일이었다. “제가 날짜를 정확하게 기억하는 이유가 있어요. 당시에는 TV가 저녁 6시나 돼야 나왔는데, 석가탄신일 같은 공휴일이 되면 TV가 아침부터 나오고 어린이를 위한 만화도 틀어줬어요. 그래서 며칠 전부터 그날을 기다려왔거든요.”
하지만 이날 아침 TV는 먹통이었다. 집에는 어머니도 계시지 않았다. 밖으로 나가보니 동네 어른들이 웅성거리며 길가에 서 있었다. 저 멀리에서 누군가 양쪽으로 부축을 받으며 오고 있었다. 혼절한 어머니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아버지에 대한 소식을 모르는 상태였거든요. 그런데 어머니의 그 모습이 너무 무서운 거예요. 도로 집안으로 뛰어 들어왔어요.” 겁에 질린 정씨는 아침에 TV를 볼 생각에 들떠 가지런히 개어놓은 이불 사이에 고개를 파묻고 울음을 터뜨렸다. 당시를 떠올리던 정씨는 고개를 돌리고 한참 침묵했다. “때로는 내가 아직 열두 살을 못 벗어난다는 생각이 들어요.”

광주에서 상황이 정리될 때까지 장례를 치르지 못했다. “말하자면 상갓집은 차려졌는데 상이 끝나지를 못하는 거예요. 하루는 어느 분이 딸기가 가득 담긴 바구니 두 개를 가져다주셨는데, 어린 마음에 딸기가 한가득 있으니 얼마나 좋았겠어요. 그걸 막 집어먹다가 갑자기 어느 순간 ‘내가 왜 이렇게 속없는 행동을 하지?’ 하는 생각이 딱 드는 거예요. 그래서 그냥 먹다가 말았던 기억이 있어요.”
“학생들 잘못이 아니란다”
한 달이 지난 뒤에야 함평경찰서 앞에서 영결식이 열렸지만 그는 아버지의 유골함을 만져볼 수도 없었다. 영결식이 끝나자마자 유골함은 국립서울현충원으로 보내졌다. 유가족은 나중에야 함평경찰서에서 마련한 관광버스를 타고 가서 안장식에 참석할 수 있었다. “제대로 된 애도를 못했어요. 다들 빨리 덮고 싶어 했으니까요. 유골을 붙들고 통곡이라도 했다면 좀 나았을 텐데.”
장례가 끝난 뒤 정씨네 가족은 광주로 이사했다. 비가 조금씩 내리던 아침이었다. “마을 어르신들이 모두 나와서 이삿짐을 날라줬어요. 그 모습을 아직도 잊지 못해요. 그 안타까운 마음…. 어릴 때지만 그런 게 느껴졌어요. 그리고 광주로 오는데 비가 정말 많이 쏟아지더라고요. 쓸쓸함이랄까 황량함이랄까 이루 말할 수 없는 감정이었어요.” 그때부터 정씨는 웃음이 없는 ‘무표정한 아이’가 됐다.
집안 형편은 몹시 어려웠다. 공무 중 사망한 아버지 앞으로 1000일 치에 해당하는 봉급이 나왔지만 친척이 가로챘다. 첫 3~4년 동안 연금은 나오지 않았다. 이후 나온 첫 연금은 월 3만원이었다. 나중에 비로소 정씨의 아버지가 국가유공자로 인정되면서 받을 수 있었던 혜택은 정씨를 비롯한 자녀들의 학비 면제뿐이었다. “살아남는 게 목적인 삶이었어요. 한번은 어머니가 ‘두 시간 자니까 눈이 안 떠져서 일을 못하겠다, 세 시간 자니까 천국 같더라’고 말씀하시더라고요.” 그러나 정씨의 어머니 박덕님씨(80)는 당시 시위에 참여한 시민들을 원망하지 않았다. 박씨는 아들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다. “학생들 잘못이 아니란다.” 이 말 한마디가 정씨를 다잡아주었다.

정씨에게 아버지가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알려준 사람은 없었다. 고등학교 때 읽은 책을 통해서 아버지가 갑자기 돌진한 버스에 치였다는 사실, 그 버스를 몰던 사람이 버스를 운행하다 시위대 행렬에 끼게 된 배 아무개씨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당시 배씨는 현장에서 체포돼 재판을 받았고 “최루가스가 버스 안으로 들어와 눈을 뜰 수 없는 상황이었다”라고 진술했다고 적혀 있었다. 그는 사형선고를 받았지만 특별사면으로 1982년 12월 석방됐고, 1998년 7월 재심을 통해 무죄를 선고받았다. 유가족들은 재판 소식조차 듣지 못했다.
그나마 아버지와 함께 근무한 경찰관 박 아무개씨가 집으로 찾아와 그날 일어났던 일을 전해주었다. 정씨가 고등학교 3학년 때 일이었다. “이미 도청 앞은 시위대로 가득 차 있었대요. 그때 차라리 경찰부대가 못 들어갔으면 좋았을 텐데, ‘경찰들이에요’ 하니까 시민들이 길을 터준 거예요. 시민들하고 경찰하고는 서로 악감정이 없었으니까요. 부대가 자리를 잡고 대기하고 있는데 그 사이로 버스가 여러 대 통과했다고 하더라고요. 첫 번째 버스, 두 번째 버스까지는 지나갔는데 세 번째 버스가 갑자기 방향을 틀어서 경찰 저지선을 들이받은 거예요.” 버스에 치인 정충길 경사·이세홍 경장(당시 39세)·박기웅 경장(38)·강정웅 경장(38)이 사망했고, 7명이 다쳤다.
사상자를 구급차에 실어 조선대학교 병원으로 데려간 동료들도 시위가 격해지자 도망치듯 병원을 빠져나와야 했다. 병원에 입원해 있던 환자들이 경찰들에게 ‘무사히 빠져나가려면 빨리 옷을 갈아입으라’며 자신들이 입고 왔던 옷을 건넸다. “동료분들도 마음이 너무 힘들었다고 하시더라고요. 전우가 죽었는데 말 한마디도 못했으니까요. 나중에 알아보니까 아버지 동료분들이 은퇴를 하시고 나서 다들 빨리 돌아가셨어요.”
38년 만에 열린 공식 추모식
아버지의 죽음은 어디에서도 말할 수 없었고 그 누구도 말하지 않았다. 5·18 관련 단체에서도 경찰 유가족이라는 이유로 이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유가족들은 당시 순직한 경찰관들이 가해자가 아니었음을 국가에서 명백하게 밝혀달라는 탄원서를 여기저기 썼지만 이미 행정적으로 처리된 사안이라는 답변만 돌아왔다. 가족 안에서도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말을 꺼내기는 어려웠다. “누님들은 누님들대로, 동생들은 동생들대로,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감정이 다 다르더라고요. 그러니까 어느 순간 아예 서로 언급을 안 하게 되고요.” 소외 속의 소외가 겹쳐졌다.

정씨는 자신의 자녀들에게도 할아버지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았다. 단지 공무 중에 돌아가신 경찰관이었다는 이야기만 들려주었다. “만약 아버지가 정말 공무 중에 단순한 교통사고를 당해 돌아가신 거라면 이렇게 괴롭지는 않았을 텐데 하는 생각을 자주 했어요. 아버지는 역사의 수레바퀴 아래에서 그냥 깔려 뭉개진 거예요.”
2017년 6월8일 국회에서 당시 김이수 헌법재판소 소장 후보에 대한 인사청문회가 열렸다. 김이수 후보는 군 법무관으로 재직 중이던 1980년 10월 경찰을 향해 돌진했던 운전사 배씨에게 사형선고를 내린 바 있다. 이에 대한 지적이 나오자 김 후보는 배씨에게 직접 사과했다. “그 장면을 나중에야 봤어요. 이게 뭐지? 누가 누구에게 용서를 구하고 사과를 하는 거지?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더라고요.” 정씨는 다시 청와대와 경찰청에 탄원서를 썼다.
마침내 2018년 10월 전라남도경찰청에서 5·18 때 순직한 경찰관 4명을 기리는, 38년 만의 첫 공식 추모식이 열렸다. 민갑룡 당시 경찰청장도 참석한 자리였다. 전라남도경찰청 앞에는 순직 경찰관들의 부조상이 세워졌다. 정씨는 아들과 함께 추모식에 참석했다. 모든 경찰관들이 아버지를 향해 경례를 하고 예를 표하는 모습을 보고 정씨는 어느 정도 위로를 받았다.
올해 초 정씨는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이하 조사위)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2019년 12월 5·18진상규명법에 근거해 꾸려진 조사위는 2021년 1월 해당 법을 개정해 ‘진상규명의 범위’를 넓혔다. 시민 피해자뿐만 아니라 군경 피해자까지 조사에 포함했다. 그동안 5·18에 관한 진상조사는 9차례 진행됐지만 단 한 번도 순직 경찰관들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진 적은 없었다. 이번이 처음이었다.
정씨는 당시 버스를 몰았던 배씨를 직접 만나고 싶다는 뜻을 조사위에 전했다. “그분을 가해자라고 하고 싶지는 않아요. 당사자라고 할게요. 당사자 배씨가 피해자이기도 하지만 이 상황에 대한 책임이 아주 없는 건 아니잖아요. 이분이 그래도 한 번쯤은 우리 어머니들에게 그동안 정말 미안했다는 말을 해주길 바랐어요. 각자가 역사 속의 피해자였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서로 화해한다면 이제 마지막 질문이 남겠죠. 그럼 정말 가해자는 누구였는가? 이런 상황, 이런 역사를 만들어낸 사람이 누구인가? 이 질문을 던질 때 역사가 진일보하는 게 아닐까요. 그래야 다시는 저희 같은 피해자들이 나오지 않을 수 있겠죠.”
조사위는 유가족과 배씨의 만남을 위해 양쪽 모두를 설득했다. 쉽지 않은 과정이었다. 정씨의 어머니 박덕님씨조차 처음에는 “세월이 다 지났는데 뭐 하러 만나느냐”라며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가 마음을 돌렸다. “저도 막상 만날 날짜가 정해지니까 마음이 정말 흔들리더라고요. 어려웠어요. 배씨도 그 자리에 나오기가 쉽지 않았을 거예요.” 정씨가 말했다.
배씨와 순직 경찰관 유가족들은 지난 5월19일 국립서울현충원에서 만났다. 한 유가족은 아직 마음이 정리되지 않아 자리에 참석하지 못한다고 알려왔다. 배씨는 순직 경찰관들의 묘비 앞에 무릎을 꿇었다. “정말 뭐라고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그 현장을 꿈이라도 한번 꿔봤으면 하는 생각도 들었는데 도저히 꿈에 나오지 않더라고요. 죄송합니다.” 박덕님씨는 “세상을 잘못 만나서 그랬겠거니 하고 죽은 듯이 42년을 살았다”라며 배씨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렸다. 한참 말을 잇지 못하던 그는 배씨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세요. 이제는 다 풀어버리시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