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 역사에서 가장 절망적인 순간에 가장 극적인 승리를 이끌어낸 사람,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결과를 거의 혼자 힘으로 일궈낸 사연을 꼽으라면 1597년 음력 9월 진도 앞바다에서 벌어진 이순신의 명량해전을 들 것 같구나. 명량해전은 1000만 관객이 본 영화 〈명량〉을 비롯해 각종 드라마나 다큐멘터리의 단골 소재이고, 그만큼 널리 알려져 있지. 그러나 아빠는 이 전투를 돌아볼수록 그 의미가 커지고 되새길수록 감동이 깊어지는 걸 느낀다. 오늘 명량해전 이야기를 되짚어보려는 이유야.
우선 ‘명량’ 이전을 보자. 그해 7월 칠천량해전으로 무적의 조선 함대는 일순간에 붕괴됐다. 도원수 권율의 부탁을 받고 바다로 나온 이순신은 거제 현령 등 칠천량에서 전멸을 면한 경상 우수영 수군들을 만난다. 이때 장수들은 이순신을 보고 소리 내서 엉엉 울었다고 해. 이순신도 피눈물을 흘렸겠지. 피차 얼마나 기막힌 일이었겠니.
아무 벼슬도 없이 동분서주하던 이순신에게 삼도수군통제사로 복귀하라는 어명이 떨어진다. 이순신을 못 잡아먹어 안달하던 선조 임금은 이 교서에서만은 바짝 엎드리는 자세를 취하지. “그대로 하여금 백의종군하게 한 것은 사람의 모책이 어질지 못함에서 비롯한 일이었거니와 오늘 이처럼 패전의 욕됨을 당하니 무슨 할 말이 있으랴. 무슨 할 말이 있으랴.” 한국 역사에서 왕이 신하에게 이렇게 통렬하게 반성을 표한 예도 드물 거야.
이미 일본군은 남해 바다를 휩쓸고, 한때 이순신의 본영인 전라 좌수영이 있던 여수와 순천 지역까지도 활개를 치고 돌아다녔어. 일본군과 목숨을 건 숨바꼭질을 벌이며 이순신은 함대 12척을 수습한다. 불과 몇 달 전 조선 수군의 10분의 1에도 훨씬 못 미치는 전력. 조정은 이순신에게 바다를 버리고 육지에서 싸우라고 명령한다. 언뜻 보면 합리적인 것 같지만 이건 일본군들에게 사통팔달의 바다를 내주겠다는 얘기였지. 이에 이순신은 유명한 상소를 올린다. “아직 신에게는 열두 척의 배가 남아 있습니다 (…) 제가 죽지 않고 살아 있는 한 적은 감히 우리를 깔보지 못할 것입니다.”
아빠는 이순신의 일생에 몇 차례 있었던 ‘별의 순간’ 가운데 이 장면도 꼭 들어가리라고 생각한다. 이건 단순한 자신감의 표출이 아니었어. 처절한 용기였다. 몇 달 전인 1597년 2월, 이순신이 통제사 직을 잃고 한양으로 압송될 때 죄목 가운데 하나는 ‘기망조정(欺罔朝廷) 무군지죄 (無君之罪)’, 즉 ‘조정을 속이고 임금을 능멸한 죄’였어. 임금과 조정이 내린 명령을 따르지 않은 대가였지. 그런 판에 이순신은 또 한번 조정의 뜻에 정직한 반기를 든 거야. 이순신을 같은 혐의로 잡아 족치는 빌미가 될 수도 있는 직언이었지.
하지만 이순신은 이 위험을 감수한다. 압도적으로 강한 적을 이기기 위해서는 내부의 걸림돌부터 걷어내야 해. 무능한 상관부터 겁먹은 부하들까지 다독이고 설득하고 때로는 적과 싸울 때만큼이나 큰 용기를 발휘하면서 말이야. 이순신은 미니 함대 12척으로 일본군 대함대와 맞붙을 전장을 고른다. 그의 선택은 조선에서 가장 물살이 세다는 폭 좁은 바다 울돌목, 즉 명량(鳴梁)이었지. 적의 대병력이 몰려오더라도 좁은 물길에서 움직일 수 있는 배는 한계가 있으니 수적인 열세를 극복할 수 있다고 본 거야.
마침내 1597년 9월16일 130척이 넘는 일본군 대함대가 몰려온다. 이순신은 함대 13척(장계 올려 보낸 뒤 또 한 척을 찾아낸 모양이야)을 이끌고 명량으로 나간다. 인근 육지 산자락에는 백성들이 까맣게 올라가 이 말도 안 되는 싸움을 굽어보고 있었지. 이순신의 일기에는 “꿈에 어떤 신인(神人)이 ‘이렇게 하면 크게 이기고, 이렇게 하면 지게 된다’고 하였다”라고 기록돼 있어. 꿈에 나타난 이가 무슨 말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그는 이순신더러 ‘네가 선봉에 서야 이긴다’라고 하지 않았을까 싶다. 나머지 배 12척이 어기적거리는 가운데 조선 삼도수군통제사가 탄 좌선이 단독으로 일본군 함대를 막아섰으니까.
아예 닻을 내려버린 이순신의 배 한 척은 울돌목 한가운데에 버티고 서서 불사신처럼 싸웠다. 총사령관이 선봉에 나서는 건 보통 최악의 순간 부하들의 기세를 고조시키기 위해서지. 그런데 천하의 이순신도 선봉에 서는 건 각오했지만 달랑 혼자서 싸우게 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을 거야. 저만치 물러선 부하들은 우물쭈물 다가올 기미가 없었어. 여기서 이순신은 두 가지 깃발을 세운다. 장수들을 부르는 초요기(招搖旗)와 통제사를 지근거리에서 호위하는 중군장을 부르는 중군영하기(中軍令下旗).
‘이순신’다운 슬픈 결정
그러나 용기는 공포를 넘지 못했다. 조선 함대는 달아나지도 못했지만 다가오지도 못했어. 그나마 찍혀서 불린 중군장 김응함과 거제 현령 안위가 미적거리며 나섰다. 이때 이순신은 안위에게 이렇게 호통을 치지. “안위야, 군법에 죽고 싶으냐(欲死軍法乎)? 네가 군법에 죽고 싶으냐(汝欲死軍法乎)? 달아난다고 살 수 있을 것 같으냐!” 김응함에게는 이렇게 일갈한다. “중군장 너는 네 임무를 다하지 못했으니 당장 목을 쳐야 하나 공을 세울 기회를 주겠다.” 통제사 홀로 일당백의 싸움을 벌이는데 부하들이 다가서지 않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에서도 이순신은 욕설과 저주를 퍼붓는 대신 ‘군법’과 ‘책임’을 내세운다. 위기의 순간에도 지켜야 할 체계가 살아 있음을 부하들에게 일깨웠다고나 할까.
이순신의 호통에 안위와 김응함은 일본 함대를 향해 돌격해 들어간다. 안위의 배가 위기에 처한 순간 이순신의 좌선이 안위를 포위한 일본군 배들을 근접사격으로 격침시키면서 전황은 극적으로 변하지. 나머지 열 척의 조선 함대가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일본군이 그득한 좁은 바다 명량으로 뛰어들고 혼이 나가버린 일본 함대는 무참하게 깨져나갔어.
세계 해전사를 뒤져도 이 정도 열세를 극복한 승리는 찾아보기 힘들다. 이순신 자신이 ‘천행(天幸)’이라고 일기에 쓸 만큼 극적이었지. 그러나 명량의 승리에 기뻐하던 백성들 중 많은 수는 일본군에 학살당했다. 이순신이 함대를 물려 오늘날의 전라북도 앞바다까지 후퇴하자 일본군은 서남해안 일대를 장악하고 분탕질했던 거야. 슬픈 일이지만 이순신의 이 결정 또한 ‘이순신’다운 일이었어. 그는 승리했다고 자만하지 않고 또다시 승리하리라는 요행을 바라지 않았다. 기적적인 승리를 거둔 다음이라면 보통 사람들은 기고만장하고 자신의 힘을 과신하게 마련이지만, 이순신은 그 함정에 빠지지 않았던 거야.
이순신도 승리에 환호하는 백성들을 지켜봤겠지. 자신이 북쪽으로 물러나면 저들 태반은 일본군의 복수에 도륙될 것을 모르지 않았을 거야. 하지만 그는 냉정하게 함대를 물렸다. 백성들을 저버려서가 아니라 더 많은 이들을 아끼기 위해, 더 많은 이들을 버리지 않기 위해, 이순신은 최선의, 하지만 뼈아픈 선택을 했던 거야.
역사상 대부분의 사건이 그렇지만 특히 명량해전은 그 안에 담긴 사연들이 너무 무겁다. 기적적인 승리였으나 그 승리를 일궈낸 건 하늘이 아니라 이순신과 부하들이었고, 그 승리는 결코 우연이나 행운의 결과가 아니었기 때문이야. 명량해전의 전말에는 피 말리는 고민과 속이 타들어가는 갈등, 용기와 비겁함, 아둔함과 지혜가 빚어낸 미추(美醜)와 공과(功過)가 선연하게 쌓여 있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