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틴의 브레인’이라 불리는 러시아 철학자 알렉산드르 두긴. ⓒBBC Newsnight 화면 갈무리

전쟁이 장기화할수록 오히려 의문은 계속 쌓여간다. 푸틴은 대체 왜 전쟁을 일으켰을까. 실리로든 명분으로든 국제사회는 푸틴의 머릿속을 이해하기 어렵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확장이나 푸틴의 야욕 따위로 침략의 이유를 설명하기에는 뭔가 부족하다.

여기서 한 사람이 등장한다. ‘알렉산드르 두긴’이라는 러시아 철학자다. 모스크바 국립대학 교수를 지냈고, 러시아 내에서는 스타급 인지도를 가진 인물이다. 낯선 인물이지만,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이후 국내 언론에서도 ‘푸틴의 브레인’이라며 주목하기 시작했다.

두긴의 사상을 한마디로 압축하면 ‘유라시아주의’다. 그는 해양을 중심으로 한 유럽과 미국 문명(대서양주의)이 근대 이후 러시아 등 대륙의 문명을 짓밟아왔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중요한 건 ‘문명’이다. 그는 개인의 자유·자본주의·페미니즘 같은 근대문명의 핵심 가치를 부정한다. 20세기 소련의 통치이념이었던 사회주의도 마찬가지다. 두긴에게 사회주의란 서구에서 유입된 사상일 뿐이다. 종교·문화·관습 등에서 전통을 회복하고 러시아가 유라시아의 지배권을 되찾아야 한다는 것이 두긴의 사상이다. 그런 점에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은 ‘문명의 탈환’ 전쟁이다. 두긴은 1997년 펴낸 〈지정학의 기초:러시아의 지정학적 미래〉에서 이미 우크라이나 병합을 러시아의 패권 전략으로 제시했다. 침공을 개시한 지난 2월24일 우크라이나의 존재를 부정했던 푸틴의 연설도 이 책에서 비롯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이 책은 러시아 군 장교들의 교재이기도 하다.

우리에게는 낯설지만, 유라시아주의의 연원은 깊다. 거슬러 올라가면 19세기 서구 세력에 맞서 러시아 문명의 고유함을 지키려 했던 슬라브주의가 출발이다. 두긴에 따르면 톨스토이나 도스토옙스키도 유라시아주의의 계보에 있다. 이후 볼셰비키 혁명에 반대하여 러시아를 떠난 망명 지식인들이 사상적 기반을 다졌다. 사회주의 국가 시절 유폐된 이 사상은 소련 해체 이후 허무와 무력감에 빠진 러시아 엘리트 집단을 사로잡았고, 두긴은 그 정점에 있는 인물이다.

막스플랑크 연구소의 샹뱌오 박사. ⓒ샹뱌오 제공

〈RFA 자유아시아방송〉은 두긴에게 주목해온 국내외 연구자의 만남을 주선했다. 먼저 중국인 샹뱌오 박사. 그는 중국에서 떠오르는 지식인이다. 1972년생으로 영국 옥스퍼드 대학 교수를 지냈고, 지금은 독일의 저명한 싱크탱크인 막스플랑크 연구소 사회인류학연구소 소장으로 재직 중이다. 그가 20대에 발표한 베이징 대학 석사논문 〈경계를 초월한 공동체:베이징의 절강촌 생활사〉는 도시와 농촌, 현대와 전통 사이에서 변화하는 중국인의 삶을 들여다본 고전으로 꼽힌다. 2008년에는 문화인류학계의 권위 있는 상인 ‘앤서니리즈상’을 수상했다. 지난해 성공회대 동아시아연구소가 펴낸 〈중국과 비중국 그리고 인터 차이나-타이완과 홍콩 다시보기〉에 공저자로 참여했다. 중국 사회의 변화, 세계화와 포퓰리즘 문제 등을 살핀 책 〈방법으로서의 자기〉(가제)가 올해 하반기 국내에도 출간될 예정이다. 2020년 발간된 이 책은 14쇄를 찍는 등 중국 청년 지식인의 필독서로 자리 잡았다.

샹뱌오는 러시아 문제를 이야기할 때도 빼놓을 수 없는 학자다. 유럽에 거주하는 문화인류학자로서 그는 2014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의 크림반도를 강제 병합할 때부터 두긴에게 주목했다. 두긴의 유라시아주의에 대한 러시아 청년들의 열광이 시진핑 집권 이후 중국의 애국주의 청년들에게도 전염되지 않을까 염려했다. 그리고 그 염려는 현실로 드러나고 있다.

국내에서는 〈유라시아 견문〉의 저자인 이병한 역사학자가 맨 처음 두긴을 주목했다. 그는 2017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두긴을 직접 만나 인터뷰했다. 당시 〈프레시안〉에 실린 인터뷰에서 두긴은 1917년 러시아혁명에 대해 “볼셰비키의 실험은 18세기 이래 추진해왔던 러시아의 유럽화를 더욱 심화시키고 말았다. 러시아 문명의 완전한 소멸, 좌파 버전 ‘역사의 종언’이었다”라고 말했다.

임명묵은 요즘 주목받는 청년 작가다. 〈K를 생각한다〉 〈거대한 코끼리, 중국의 진실〉 등 저서를 통해 1990년대생으로서 대중문화부터 국제정세까지 남다른 통찰을 보여줬다. 대학원에서 아시아 지역학을 공부하고 있는 그 또한 일찍부터 두긴에게 주목했다. 러시아 지배층의 사상적 변화가 심상치 않고, 그 기저에 두긴이 있다고 파악했다.

온라인 화상회의로 진행된 세 사람의 대화는, 두긴과 러시아 문제로 시작해 정치적 올바름, 각국 청년세대 문제 등으로 뻗어 나갔다. 화상회의 이후 추가 인터뷰 등을 통해 내용을 덧붙였다.

알렉산드르 두긴을 일찍부터 주목한 분들이 모였다.

샹뱌오:전쟁 발발 이후 푸틴의 연설이나 글들을 상세히 살펴봤다. 2021년 7월 푸틴이 크렘린궁 홈페이지에 글을 하나 올린다. 푸틴은 이 글을 모든 병사에게 읽게 하라고 말했다. 여기서 푸틴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하나’라고 말한다. 푸틴은 우크라이나의 수도인 키이우를 러시아 문명의 기원이라고 보고 있다. 두긴과 일치한다. 두긴에 따르면 우크라이나인은 러시아인보다 더 러시아 문화의 핵심에 가까운 사람들이다. 우크라이나의 문명이 러시아 본토의 문명보다 더 장구하다는 것이다. 즉 이번 전쟁은 문명의 유전자를 보관하고 있는 발원지를 탈환하기 위한 것이다. 최근 두긴은 “러시아는 당연히 국제법을 위반해도 된다. 왜냐하면 우리의 문명이 국제법보다 더 높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유라시아 견문〉 저자 이병한 역사학자. ⓒRFA 자유아시아방송 윤무영

이병한:2017년도에 모스크바에 거점을 두고 동유럽부터 중앙아시아까지 반년 정도 여행했다. 푸틴은 한국에서야 독재자이고 서구에서도 비판적이지만, 당시 러시아의 지식인·학생을 만나보니 푸틴에 대한 지지가 정말 견고했다. 단순한 지지가 아니라 종교적·사상적 지향에 기반한 지지였고, 거기에 유라시아주의가 있었다. 러시아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을 파악하는 데 적임자라고 생각했다. 인터뷰하고 싶다고 이메일을 보냈고, ‘칠고초려’ 끝에야 두긴을 만날 수 있었다.

임명묵:원래 러시아에 관심이 많았다. 공부를 하다 보니 러시아의 국가정책을 결정하는 데 두긴이 영향을 미쳤다는 서구권의 자료들을 접했다. 국내 번역서 중에는 〈푸티니즘〉 〈가짜 민주주의가 온다〉에서 두긴을 다뤘지만, 좀 더 깊은 연구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두긴의 사상은 어떤 것인가?

샹뱌오:두긴의 머릿속에서 이 세계는 대서양주의와 유라시아주의 사이의 대결이다. 그가 보기에 1990년대에 러시아가 무너진 것은 대서양주의가 유라시아주의를 불공평하게 침략했기 때문이다. 대서양주의는 개인주의·상업적·개방적·민주적이라는 특징이 있다. 대륙 문명은 집체적이고 위계적이다. 푸틴은 이를 ‘수직적 권력’이라고 부르는데, 개인이 국가와 집단에 복종해야 한다는 뜻이다.

임명묵:근대성에 대한 반발이다. 두긴은 서구 해양세력이, 다른 문명이 수천 년간 쌓아온 전통과 문화를 파괴했다고 본다. 그걸 ‘그레이트 리셋(Great Reset)’이라고 표현한다. 여기에 맞서는 길은 대륙에 있는 위대한 민족들이 연합해서 서구의 글로벌리스트들을 쳐부숴야 한다는 것이다. 페미니즘이나 다문화주의 같은 정치적 올바름 문제 역시 두긴이 보기에는 서구의 문명일 뿐이다. 두긴은 도덕적 타락의 대표적 증상으로 동성애를 꼽는다.

이병한:개인적으로 21세기의 메가트렌드를 ‘포스트 웨스트’라고 본다. 아편전쟁 이후 서양이 압도했던 세계사가 200년 만에 크게 바뀌고 있다. 이 와중에 러시아는 유라시아주의를 택한 것이다. 중국도 시진핑을 중심으로 한 중화 문명의 위대한 부흥으로 가려 한다. 심상치 않은 흐름이다.

샹뱌오:오늘날 왜 많은 사람들이 국제정치에 관심을 가질까? 정글에서 살아가는 것 같은 자신의 삶을 국제사회에 투영하기 때문이라고 본다. 국제정치에 이 감정이 투영되면 매우 강경한 민족주의적 입장으로 나타난다. 이것은 허무주의다. 왜냐하면 여기에는 공공의 원칙이나 정의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두긴이 대륙과 해양으로 문명을 갈라서 각자의 전통을 강조하는 것처럼 말이다. 중국처럼 강대한 힘을 가진 나라에서는 (이런 사상이 번지면) 곤란한 상황이 올 수도 있다.

중국이나 한국의 청년세대가 두긴과 같은 인물에게 빠져들 가능성도 있을까?

〈K를 생각한다〉를 쓴 임명묵 작가. ⓒ임명묵 제공

임명묵:러시아인에게는 엄청난 파괴력을 가질 것은 분명한데, 다른 나라 사람에게는 너무 추상적이다. 다만 과거 ‘디시인사이드’ 같은 한국의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푸틴과 러시아를 지지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페미니즘이나 정치적 올바름 따위를 다 무시하는 푸틴의 모습에 열광하는 청년들이 꽤 존재했다. 푸틴으로 상징되는 남성적 권력이 자신들이 불편하게 생각하는 것들을 시원하게 밟아줬기 때문이다. 이런 혐오와 분노를 이용해 대중을 선동한다면 한국에서도 힘을 발휘할 가능성이 있다.

이병한:지금 한국은 ‘국뽕’의 정점에 서 있다. 선진국이 되었지만 개인과 국가가 앞으로 어디로 가야 할지는 막막한 상황이다. 목적 없는 삶이라고 할까. 그럴 때 뭔가 심오하고 거창해 보이는 의미를 누군가 부여해준다면 그것이 호소력을 가질 수 있는 토양은 깔려 있다. 다만 한국에는 두긴처럼 어떤 비전을 설계해서 제시할 만한 사상가가 아직 없는 것 같다.

샹뱌오:내가 심각하게 보는 건 청년들의 허무주의다. 특히 시험을 쳐서 고위 관료가 된 테크노크라트 청년들의 허무주의가 문제가 될 것이다. 평생 공부만 했던 이들은 막상 권력을 가지게 되면 뭔가 의미를 찾고 싶어 한다. 숭고한 이론을 찾게 되는 것이다. 최악의 경우 자칫 두긴 부류의 주장을 숭고한 이론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렇게 되면 해나 아렌트가 말한 ‘악의 평범성’이 나타날 수도 있음을 염려한다.

중국과 러시아 청년들의 상황은 어떤가?

임명묵:러시아 여행에서 청년들을 만나며 두 가지 정서를 엿보았다. 하나는 러시아에는 희망이 없으므로 외국으로 탈출해야 한다는 체념적 정서. 또 하나는 강대국으로서 러시아에 대한 자부심과 사명을 강조하는 정서였다. 동아시아의 청년들 역시 그런 이중 정서가 있는 것 같다.

샹뱌오:중국 청년들의 경우 두 가지 그룹이 있는 것 같다. 하나는 일본의 사토리(달관) 세대, 한국의 N포 세대와 비슷한 이들이다. 또 하나는 (한국에도 잘 알려진) 샤오펀훙(小粉紅·소분홍) 같은 애국주의 그룹이다. 전자는 도시의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나 신분 상승 욕구가 컸지만 좌절한 이들이다. 팬데믹 경제위기로 이런 이들이 급격하게 늘어날 가능성이 크다. 후자는 주로 농촌 출신의 기층 청년들이다. 이들은 ‘국가는 발전했지만 자신들은 소외됐다’는 불만이 크다. 규모는 줄어드는 분위기인데, 대신 더욱 극단화하고 있다. 두 부류의 공통점은 자신의 삶에서 의미를 잃어버렸다는 점이다. 돈이 있는 청년들은 러시아 청년들처럼 이민을 택한다. 그래서 내가 요즘 강조하는 게 ‘부근’이라는 말이다. 한국어로는 ‘주변’이다. 자신의 일상생활에서 의미를 찾기 위한 움직임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친러 반군 장갑차가 4월21일 우크라이나 남부 항구도시 마리우폴 시내를 지나가고 있다. ⓒREUTERS

한국에서도 정치적 올바름이나 젠더 문제는 인터넷에서 뜨거운 논쟁거리다. 중국의 상황은 어떤가?

샹뱌오:중국도 비슷하다. 정치적 올바름에 대해서는 서구사회가 이중 잣대를 갖고 있다는 반발이 있다. 자신들에게는 적용하지 않고 중국에만 강요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중국에서도 ‘Black Lives matter(아프리카계 미국인을 향한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운동)’가 이슈였다. 중국 역시 청년 남성들이 정치적 올바름에 반발한다. 왜냐하면 높은 도덕적 원칙을 가지고 자신을 무시한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페미니즘 문제에 대해서는 러시아처럼 고유의 전통을 강조하며 비판한다. 그러나 이는 논리적이지 않다. 중국과 러시아는 여성이 해방됐던 사회주의의 역사가 있다. 여성을 존중하고 여성 권력을 강화해온 현대적 전통이 있는 것이다. 푸틴과 두긴이 부정한다고 해도 이는 실존하는 역사적 경험이다.

〈RFA 자유아시아방송〉과 줌미팅 하는 샹뱌오 박사(큰 화면), 이병한 역사학자(맨 아래), 임명묵 작가(위에서 세 번째). ⓒRFA 자유아시아방송 신선영

세계적으로 반중 정서가 심각해지고 있는데, 이번 전쟁을 통해 반러시아 정서도 들끓는 분위기다. 중국에서는 외국의 반중 정서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나?

샹뱌오:청년들의 경우 확실하다. 외국의 반중 정서에 더욱 강하게 맞서야 한다고 생각한다. 중국을 비판하는 외국의 논리는 불공정하며, 중국의 굴기에 대해서 질투심을 느낀다고 본다. 최근 대학생과 대화를 나눈 적이 있는데, 외국인들이 과거에는 중국인을 가난하다고 멸시하더니 지금은 돈이 많다고 질투한다고 보더라. 중국이 해외를 보는 시각이든 해외가 중국을 보는 시각이든 서로 악순환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에 우리가 러시아인을 어떻게 바라볼지 고민해야 한다. 러시아에 대한 비난 여론이 높아질수록 러시아 민중은 방어적으로 나오게 된다. 비판을 하면 할수록 내부적으로는 두긴이 설파하는 담론이 강화될 가능성이 크다. 공격이 아닌 교류를 통해 러시아인들과 차분하게 대화할 수 없는지 성찰할 필요가 있다.

이병한:우크라이나 문제와 관련해서 잘 살펴봐야 하는 것이 있다. 미국과 유럽, 그리고 한국과 일본을 뺀 다른 국가들의 반응이다. 한국의 공론장에서 논의되는 것처럼 그렇게 일방적이지 않다. 중국은 물론 인도·브라질·남아프리카공화국이 유엔의 러시아 제재에 동참하지 않고 있다. 이른바 ‘브릭스(BRICs)’ 국가들이 러시아 제재에 동참하지 않은 것이다. 모두가 푸틴을 욕하고 젤렌스키를 지지하는 것은 아니다. 서유럽과 한·미·일 중심으로 세계를 보면 놓치게 되는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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