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뢰의 위기로 압축되는 미국발 금융위기, 그 한복판에 신용평가 회사가 서 있다. 한국에도 잘 알려진 무디스,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 피치다. 미국 정부가 공인한 이들 ‘빅3’는 한때 ‘자본시장의 신호등’이라는 찬사를 받았지만 지금은 ‘걸레를 행주로 만드는 표백제’라거나 심지어 ‘월가의 기생충’이라는 혹평을 듣는다. 신용을 생명으로 하는 신용평가사들이 왜 이 지경이 되었을까?

10월22일(현지 시각) 미국 하원 청문회장. 미국 금융시장의 신용 수준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날이었다. 이날 공개된, 신용평가 회사 직원들이 주고받은 메신저 대화 내용은 충격이었다.
“그 거래는 말도 안 되는 거였어. 등급을 매겨서는 안 되는 거였는데….”
“우리는 모든 거래의 등급을 매겨야 해. 설사 소가 만든 상품이라도 말이야.”

또 다른 직원의 이메일에는 “우리가 부자가 돼서 은퇴할 때까지 ‘카드로 지은 집’이 무너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야”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청문회에 소환된 무디스, S&P, 피치의 최고경영자들은 “금융위기의 주범”이라는 의회의 집중포화를 피할 수 없었다.

신용평가 회사들의 도덕 불감증은 통계로도 입증된다. 지난해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사태를 전후해 MBS(주택담보부채권)를 기초 자산으로 한 파생상품에 대한 무디스, S&P, 피치의 신용등급 강등 사례는 무려 8822건에 달했다. 2006년 836건에 비해 10배가 넘는 수준이다. 주택가격이 떨어지고 모기지 연체율이 치솟자 최고 등급인 ‘AAA’로 평가받은 채권을 대거 하향 조정한 것이다.

신용평가사는 월가 금융자본의 표백제?

급격한 등급 하락은 다시 신용경색을 악화시키는 악순환을 초래했다. MBS를 기초 자산으로 하는 파생상품의 신용등급이 줄줄이 하락하면, 이를 담보로 금융기관에서 자금을 빌려 레버리지(차입) 투자를 해온 헤지펀드 등 금융 회사들은 파산을 피할 수 없고, 이들에게 투자한 금융회사도 부실화되는 도미노 현상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월가에서 모기지채권 파생상품을 취급해온 한 트레이더는 “우리가 2000 ~3000개의 MBS 정보를 보내주면 그들은 A와 AA 그리고 AAA를 적당한 비율로 매겨서 보내준다. 한국으로 치면 마치 KS마크를 찍어주는 기계와 같다. 그러면 우리는 각 채권의 등급을 투자자에게 팔기 좋게 섞어서 내놓는다”라고 말했다.

사실 신용평가 회사들의 책임론은 대규모 금융위기가 터질 때마다 되풀이 제기되었다. 무디스와 S&P는 2001년 회계부정으로 파산한 미국 거대 에너지기업 엔론이 파산하기 나흘 전까지도 ‘투자 적격’ 등급(BBB)을 매겨 투자자에게 막대한 손실을 안겼다. 전기·가스·수도 공기업인 캘리포니아 유틸리티스의 경우에도 채무불이행 판단이 내려지기 2주일 전까지 A- 등급을 유지했다.

한국에 ‘빅3’ 신용평가 회사들의 위력이 발휘된 때는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사태를 전후한 시기였다. 1997년 11월 외환위기를 맞기 직전까지 이들은 한국을 ‘투자 적격’ 국가로 A등급을 줬다가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하자 단박에 6∼12등급을 내려 숨통을 조였다. 이에 혼비백산한 한국 정부는 극심한 신용 경색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야말로 발에 땀나게 뛰어다녀야 했고, 그런 노력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2003년 3월 노무현 정부가 들어선 뒤 이라크 전쟁과 북한발 핵 이슈로 한반도에 긴장감이 증폭되면서 무디스가 ‘부정적’으로 등급을 낮추려 한다는 예측이 나오자 한국 정부는 비상이 걸렸다. 당시 반기문 외교보좌관 등이 미국으로 급파돼 진화에 나섰던 게 대표 사례다. 두 달 뒤, 노 대통령의 첫 방미에서도 대표단은 신용평가사들과의 간담회를 일정에 넣는 것을 잊지 않았다.

ⓒAP Photo세계 3대 신용평가사로 꼽히는 피치·무디스·S&P의 최고경영자인 스테픈 조인트·레이먼드 W. 맥대니얼·데븐 샤마(왼쪽부터)가 10월22일 미국 하원 청문회에 출석해 증인 선서를 하고 있다.
최근 미국발 금융위기로 신흥 국가에 대한 외국인 투자자들의 경계심이 커지자 이명박 정부 역시 신용등급 유지를 위해 동분서주했다. 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은 10월 중순 미국을 방문해 무디스, S&P 등과의 면담 결과를 소개하며 국가 신용등급에 변화가 없으리라고 관측했다. 이것이 ‘빅 뉴스’가 되는 것은 한국에서만은 아니다. 세계 금융시장의 ‘저승사자’라는 표현처럼 신용평가 회사들은 무소불위의 힘을 휘둘러 왔다. 국가 신용등급이 조정되면 그 나라의 국채는 물론이고 기업의 채권 가격과 금리 결정에도 영향을 미쳐 한 나라 경제의 안전성을 올렸다 내렸다 하기 때문이다.

신용등급은 한마디로 돈을 빌리려는 국가나 기업에 대한 ‘재무 성적표’다. 채무를 이행할 수 있는지 여부와 상환 지연 혹은 부분 상환에 따라 손실 규모가 얼마나 될지 측정해 등급별로 표시하는 예측 지표로, 채권을 사는 투자가에게 투자의 안전성을 가늠하는 정보로 활용된다. 그 결과 안전한 투자처에는 자금을 줘 사업을 확장시키고 부실한 곳에는 자금 유입을 막아 퇴출시키는 자본시장의 ‘문지기’ 구실을 해왔다.

그런데 왜 유독 무디스, S&P, 피치와 같은 특정 회사의 영향력이 이토록 큰 것일까? 한국은 물론 나라별로 자국 내 신용평가 기관들이 있는데도 말이다. 이것은 세계 금융자본 시장에서 미국이 차지하는 위상과 무관치 않다. 1975년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가 무디스, S&P, 피치 등을 국가공인 신용평가 기관으로 지정하면서 이들이 평가하는 전세계 주요 나라와 기업들의 신용등급은 미국 금융자본의 투자 활동에 중요한 잣대가 되어왔다. 그 결과 ‘빅3’는 민간 기업임에도 불구하고 국제기구와 같은 독점적 지위를 누릴 수 있었다.

김병권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센터 연구원은 “빅3의 신용등급에 따라 움직이는 자금이 세계 국채 시장의 약 40%인 20조 달러에 이른다고 한다. 이들의 평가로 인해 어떤 나라나 기업이 수백만 달러의 손해 혹은 이익을 보고 이에 따라 주식·채권시장이 요동을 치는데도 사실상 아무런 감시도 받지 않는다. 신용평가 회사의 신용은 누가 평가하는가?”라고 반문했다.

평가 대상에게 돈 받는 수익구조

신용평가 회사의 ‘신용’은 자주 의심을 받아왔다. 투명하고 공정한 정보 제공이라는 공익성에 바탕을 두었음에도 불구하고 공익과는 거리가 먼 행보를 보여왔다. 이들 회사의 지배구조를 보면 편향성 지적을 받을 만하다. 무엇보다 수익구조가 문제다. 신용평가 회사의 주요 수입원은 신용평가를 통해 발생하는 수수료다. 신용등급을 조회하는 기업이나 금융기관 같은 채권 발행자에게서 받는 수입이다. 더욱이 상위 등급일수록 수수료가 비싸게 책정되는 구조 탓에 가급적 높은 등급을 주려는 유혹을 떨치기 어렵다.

신용평가 회사 이사진의 상당수가 평가를 받는 고객사의 임원을 겸직하고 있어 압력과 로비가 개입할 여지 또한 충분해 보인다. 평가 과정이 경영진 면담 같은 고객사와의 인터뷰를 통해 이뤄지고 그 과정이 철저하게 기밀에 부쳐진다는 점에서 설령 이해관계가 반영되었다는 의심을 품더라도 이를 확인할 길도 막혀 있다.

이들이 얻는 정보의 신뢰성도 논란거리다. 특히 아시아나 남미 등 ‘변방’의 국가들에 대한 신용평가 작업이 1990년대 들어 본격 진행되어온 터라 성장률, 물가 등 드러나는 지표에 의존해왔다. 그 나라의 금융 시스템이나 단기 외채로 인한 유동성 위험 같은 내부의 취약성을 살피지 못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던 것이다. 때문에 정치 상황이나 정책 변수와 같은 주관적 항목이 강조돼 국가 간 편차가 큰 것도 문제다.  

분석가의 전문성도 과대평가되었다는 지적이 나온다. 국내 한 국책은행의 간부는 “사실 월가에서 신용등급은 사후 선언의 성격으로 받아들인다. 통계로 평가하기 때문에 정보가 늦고 질이 떨어지는 편이다. 정보 수집의 최전선에는 투자은행(IB)의 트레이더들이 포진해 있다. 신용평가 회사에서 명성을 쌓은 뒤 투자은행으로 스카우트되는 경우가 많은데 월가의 진짜 플레이어가 되기 위해서다”라고 말했다.

신용평가 회사들의 ‘항변’도 나온다. 금융위기의 주범은 따로 있는데 이들을 희생양 삼아 과도한 뭇매를 때리고 있다는 시각이다. ‘빅3’ 중에서도 시장점유율이 가장 높은 무디스는 신용평가라는 것이 채권의 매입·매도에 대한 권고가 아니며 부도가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는 보증도 아니라고 주장한다. 단지 ‘의견’일 뿐이어서 표현의 자유에 해당한다는 논리다.

그러나 이들이 끼친 영향력을 감안하면 책임이 결코 가볍지 않아 보인다. 미국발 금융위기의 직격탄을 맞은 유럽에서는 EU 차원에서 신용평가의 업무 표준을 제정하고 준수 여부를 모니터링하는 독립 기구를 제안했다. 다른 나라에서도 신용평가사들에 대한 감독·규제를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따라서 앞으로 신용평가 회사들은 어떤 식으로든 수술대에 오를 공산이 크다.

그 결과 ‘빅3’ 과점 체제가 무너지고 미국의 ‘트리플A’ 등급도 깨지게 될까? 미국발 금융위기가 지구촌을 뒤흔들고 있는데도 미국의 국가 신용등급은 여전히 최상위에서 꿈쩍도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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