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급을 우유로 준다’는, 농담 같은 일이 실제로 벌어졌다. 시장점유율 1위 서울우유에서다. 서울우유는 지난 7월부터 9월까지 임직원 급여 일부를 자사 제품으로 지급했다. 회사 측 관계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과의 통화에서 “명절을 앞두고 염가로 유제품을 제공한 이벤트였다. 희망자만 구입했고, 직급별 일괄 판매는 사실이 아니다”라고 해명했다. 그러나 재정 상황과 무관한 조치였는지 묻자 그는 “그렇지는 않다. 서울우유뿐만 아니라 업계 전체가 절박한 상황이다”라고 답했다.

우유 소비는 꾸준히 줄고 있다. 2014년 국내 시유(마시는 우유) 소비량은 2011년 구제역 파동 때를 제외하고 15년 동안 최저였다. 전문가들은 출산율 저하와 인식 전환을 원인으로 꼽는다. 주 소비층인 14세 이하 인구가 감소했고, 우유가 ‘완전식품’이라는 믿음이 깨졌기 때문이다. 일부 업체들은 치즈나 발효유, 아이스크림 등 성인시장으로 눈을 돌렸지만, 사업을 제때 다각화하지 못한 서울우유는 타격이 컸다. 그사이 공급은 도리어 늘어났다. 2014년 전국 원유생산량은 221만4039t으로, 2005년 이후 최고치다. 자연스레 분유(남는 원유를 고체로 만들어 보관하는 상태) 재고 역시 역대 최고인 1만8484t까지 치솟았다.

수요가 떨어져도 공급이 느는 건 가격이 보장되어서다. 농림축산식품부는 2013년 원유 가격 연동제를 실시했다. 전년도 평균 원유 생산비 증감액과 물가상승률을 더해 자동 결정되는 방식이다. 물가상승률 이상으로 생산비가 줄어야 원유 가격이 떨어지는 구조다. 물론 생산비가 줄어들 때도 있다. 평균 생산비가 오르든 내리든, 개별 농가는 생산비를 줄이는 편이 이익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원유 가격 연동제 시행 후인 2014년 생산비는 ℓ당 796원으로, 전년도 807원에 비해 11원 감소했다. 문제는 생산량이다. 어떤 상황에서든 생산비 이상 보상받는 가격 구조 덕에 낙농가는 계속해서 원유 생산을 늘려도 된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RFA 자유아시아방송 윤무영〈/font〉〈/div〉한 대형마트에서 소비자가 우유를 고르고 있다. 우유 시장은 업태의 특수성을 반영한 제도 때문에 가격이 떨어지지 않는 구조다.

왜 시장 원리에 맡겨두지 않고 이런 강제조항을 도입했을까? 우유 시장의 특수성 때문이다. 원유는 신선도 문제 때문에 수입이 어렵다. 국제 원유 가격이 아무리 한국보다 낮아도 원유를 액체 상태로 배송하는 비용이 더 든다. 그나마 가까운 일본·홍콩 등은 원유 가격이 한국과 큰 차이 없고, 중국은 한국 검역 기준에 맞출 만큼 낙농업이 발달하지 않았다. 국내 5600여 낙농 가구가 원유 공급 전체를 책임지기에 유업체가 ‘배짱’을 부리기 힘든 구조다. 현재 국내 낙농가가 생산하는 원유는 계약된 유업체들이 전량을 구입하도록 되어 있다.

그러다 보니 원유 가격 연동제 시행 전에도 수요는 가격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한 유업체 관계자는 “이전에는 협상으로 결정했는데, 협상 때마다 마찰이 격했다. 어차피 가격은 생산비를 고려해서 올렸고, 기업 이미지만 깎느니 연동제가 낫다고 여겼다”라고 말했다.

공급이 늘어나면서 2002년에는 낙농가들이 무한정 원유 생산을 하지 못하게 하려는 취지의 장치가 마련됐다. 낙농진흥회(농림부 산하의 원유 거래 매개 단체)가 ‘잉여원유 차등 가격제’를 도입한 것이다. 이른바 ‘원유 쿼터제’라 불리는 이 제도는, 당초 계약된 생산량의 초과분에 대해서는 국제 시세만큼만 값을 쳐주는 원칙이다. 1990년대까지는 원유 생산이 소비를 따라가지 못했지만 2002년 기록적인 원유 초과 공급 사태가 발생하면서 우유 시장에 혼란이 커지기 시작했다. 정부는 감산 호소문 발송, 저능력우 도태사업 등을 진행했으나 재고는 쌓여갔다. 쿼터제는 공급을 줄이기 위한 최후의 수단이었다. 당시 쿼터제에 반발한 서울우유협동조합과 부산경남우유협동조합은 낙농진흥회를 탈퇴했다.

그런데 공급 억제책이던 쿼터제가 요즘은 오히려 공급 보장 정책으로 변질됐다. 소비가 급격하게 줄어서다. 유업계는 쿼터만큼도 우유를 팔지 못한다. 그렇다고 쿼터를 줄이기도 어렵다. 쿼터가 일종의 낙농가 재산권으로 공공연히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2004년 440여 농가가 폐업 후 정부 보조금을 지급받았다. 이 과정에서 폐업 농가는 자신의 쿼터를 다른 농가에 판매했다. 폐업 농가가 납품하던 물량이 전부 없어진다면 공급 안정성에 타격을 주므로 낙농진흥회도 이를 인정했다.

일부 유업체와 낙농가의 공멸로 이어질 수도

낙농진흥회 직속 농가는 약 25%밖에 되지 않는다. 서울우유협동조합 소속이 35%, 기타 업체 직속 농가가 40%다. 정부가 영향력을 미치는 낙농진흥회만 쿼터를 감축하는 방안은 형평에 어긋난다. 그렇다고 쿼터를 일괄로 줄이면 ‘더 비싼 쿼터’를 산 농가가 반발한다. 서로 다른 시세에 따라 쿼터를 감축하거나, 정부가 사들이기도 어렵다. 농식품부 관계자는 “낙농진흥회 밖에 있는 농가가 자기들끼리 매매한 거래가를 정부에서 인정할 수는 없다”라고 말했다. 진퇴양난이다.

 

원유 가격 연동제는 가격을, 쿼터제는 공급을 고정시킨다. 낙농진흥회나 유업체가 전량 매입하기에, 우유가 안 팔려도 낙농가에는 타격이 없다. 시장 수요와 무관하게 생산량은 늘어나고, 공급량이 늘어나 우유가 남아돌아도 소비자가 먹는 우유 가격이 떨어지지 않는 기묘한 시장은 이렇게 등장했다.

이미 10여 년 동안 거래가 이뤄져 재산권처럼 자리 잡은 쿼터를 건드리기는 어렵다. 원유 가격 연동제는 나름대로 우유 시장의 특수성을 반영한 제도라, 폐지하고 시장 논리에 맡기자는 주장도 쉽게 꺼내기 힘들다. 익명을 요구한 학계 전문가는 과잉 재고가 일부 유업체와 낙농가의 공멸로 이어지리라고 봤다. 그는 “연동제 폐지도, 쿼터 감축도 정부로서는 큰 부담이다. 사실 ‘낙농진흥회 소속이 25%밖에 안 된다’는 말은, ‘제 발로 낙농진흥회를 나간 75%에 대해 정부는 책임이 없다’는 말도 된다”라고 말했다. 손해를 더 감당할 수 없는 유업체가 도산하고, 낙농진흥회를 떠난 유업체 직속 낙농가가 따라 폐업할 때까지 재고는 계속 증가할 것이다. 그때에도 우유 값이 떨어지리란 보장은 없다. 다만 더 적은 수의 농가와 유업체가, 비싼 가격을 감수하는 소비자에게 우유를 공급할 가능성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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