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사회는 구애와 성애에서부터 결혼과 가족제도에 이르는 사회의 기본 요소로 이성애를 채택하고 있다. 그런데 루이 조르주 탱의 〈사랑의 역사-이성애와 동성애 그 대결의 기록〉(문학과지성사, 2010)은 이성애가 사회의 기본 요소가 된 것은 17세기 후반부터였다면서, 그 이전은 이성보다 동성끼리의 친교가 더 소중한 ‘동성사회성’ 높은 사회였다고 주장한다. 17세기 후반 이전은 봉건사회였으며, 봉건사회를 지탱한 것이 남성들로 이루어진 전사(귀족) 계급이었다는 것을 상기하면 쉬이 납득이 된다.

“봉건 문화의 토대는 오로지 남성만의 세계다. 남자, 특히 전사는 흔히 여자의 세계로부터 멀리 떨어져 살았다. 이 기사들은 개인적인 용기, 즉 프뤼돔(prud’homme:용맹스러운 남자)의 용기와 봉건 질서에 대한 충성스러운 복종의 윤리, 즉 봉신의 윤리를 발전시키는 경향이 있다. 집단생활과 군사작전 그리고 위험을 함께한 경험이 불러일으키는 열광은 명백히 단순한 동지애를 종종 넘어서는 매우 확고한 유대를 낳았다. 이러한 사나이들 간의 우정은 흔히 두 기사로 하여금 죽음도 불사하도록 만드는 열렬한 관계로 발전되기도 했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이지영 그림〈/font〉〈/div〉
11세기 말 프랑스의 대표적인 무훈 서사시 〈롤랑의 노래〉는 오늘날 롤랑과 그의 약혼녀 오드 간의 사랑 이야기로 해석되고 있지만, 두 사람의 관계는 4002행 가운데 전체의 1%도 되지 않는 29행만 차지한다. 나머지는 ‘사랑하다’라는 빈번한 동사로 두 사람의 관계가 정의되고 있는 롤랑과 올리비에의 전설적인 우정에 바쳐졌다. “사실상 이것은 사랑이다. 이것은 두 남자 사이의 그 어떤 ‘육체관계’도 함축하지 않지만, 우리가 오늘날 이해하는 것과 같은 단순한 우정보다 더 강렬한 감정을 전제로 한다.” 부상당한 올리비에는 롤랑의 품안에서 숨을 거두고, 슬픔에 겨운 롤랑은 적진으로 뛰어들어 장렬하게 전사한다. 그러자 오드도 롤랑을 따라 죽는다.

올리비에의 여동생인 오드는 올리비에가 롤랑과의 신의를 다지기 위해 친구에게 증여한 존재다. 우정 어린 남자들 사이에 자신의 여자 애인이나 누이를 친구에게 양도하거나 공유하려는 경우가 있다. 오에 겐자부로는 〈레인트리를 듣는 여인들〉(고려원, 1996)에서 남자들의 이와 같은 이상심리를 동성애 욕망의 우회적 표출로 설명한다. 즉 “공공연하게 동성애를 표현할 수 없는 자가 친구와 가장 긴밀한 관계”를 만들기 위해 벌이는 이런 예식은, 여자 애인이나 누이의 몸을 매개로 친구와 성애를 나누는 것이나 같다. 영화 〈친구〉에서 준석(유오성)이 진숙(김보경)을 상택(서태화)에게 안겨준 태도 역시, 남자들 사이의 높은 동성사회성을 나타내준다. 준석과 상택이 동성애 관계였다는 게 아니다. 동성사회성의 핵심은 동성끼리의 우정이 이성애보다 높은 가치를 차지하는 것으로, 자정 넘어서까지 직장 남성들이 소복이 둘러앉아 권커니 잣거니 하는 한국 술집의 풍경을 떠올리면 한층 이해하기 쉽다.  

〈롤랑의 노래〉에서 보았듯이 기사도 문학 본래의 이상은 동성사회의 규범을 다루는 것이었으나, 이성애가 침투하면서 기사들이 왕이나 영주의 부인에게 충정을 바치는 것으로 변질되었다. 루이 조르주 탱의 〈사랑의 역사〉는 분석을 생략했지만, 중세를 지나면서 남자들만의 동성문화가 추방되고 이성애를 기반으로 한 궁정문화가 예찬되어야 했던 이유는 무장한 기사들을 순화하기 위해서였다. 노베르트 엘리아스라면 궁정의 귀부인이 중세 남성들 사이의 격렬한 우정을 흡수해가는 이 과정을 ‘문명화 과정’이라고 불렀을 것이다.
 

〈나치즘과 동성애〉김학이 지음문학과지성사 펴냄
동성애 논쟁도 지극히 ‘남성 중심적’이었구나

동성문화는 17세기 후반까지 줄기차게 궁정문화에 저항했으나 이성애 문화가 동성사회에 완전한 승리를 거두면서, 사회의 기본 요소로 이성애가 정착하게 된다. 그러나 김학이의 〈나치즘과 동성애〉(문학과지성사, 2013)는 루이 조르주 탱의 결론이 성급한 것이었다고 말해준다. 이 뛰어난 저작에 따르면, 동성사회성은 억압될 수 있을 뿐, 문명화 과정은 결코 이성애 속의 동성문화를 완전히 제거한 적이 없다.     

나치는 집권 이전부터 동성애자를 국가와 민족의 적으로 간주했으나, 정권을 차지한 히틀러는 왠지 동성애자 단속을 망설였다. 그 까닭은 당·친위대·돌격대·히틀러청소년단 등 나치 체제를 뒷받침했던 주축 조직이 모조리 ‘남성동맹’이었기 때문이다. ‘봉건적 의리’와 ‘사적인 결속’으로 짜인 나치의 역동성은 루이 조르주 탱이 우정보다 더 강렬한 감정이라고 말했던 높은 동성사회성에서 나온다. 나치는 자기 조직을 탈성화(脫性化)하면 “남성동맹의 역동성이 약화되지 않을까 우려했다”. 나치가 동성애자 적발에 전력하게 된 것은 소련과 전쟁을 벌이면서, 내부의 적을 판시할 필요 때문이었다. 동성애자 문제로 나치가 직면했던 곤경은 동성애 혐오증이 극도로 남성화된 집단이나 사회에서 일어나는 자기방어라는, 잘 알려진 결론과 만나게 해준다.

두 책은 제목과 부제에 ‘동성애’가 명기되어 있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남성 동성애’만을 이야기한다. ‘여성 동성애’가 삭제되고 없는 것은 동성애 논쟁 자체가 남성 중심 사회에서 이루어지는 지극히 남성 중심의 논의라는 것을 말해준다. 남성 동성애가 교회의 지탄을 받을 때도 여성 동성애는 면죄되었던 역사(〈사랑의 역사〉)나 나치 법전에 금지된 것 또한 남성 동성애였지 여성 동성애는 아예 언급되지 않았다(〈나치즘과 동성애〉)는 사실이 그것을 증명한다.

사족이다. 고(故) 기형도 시인은 게이들의 크루징(cruising:공공장소에서 데이트 상대를 찾는 일) 장소였던 파고다극장에서 급사하는 바람에 게이였다는 소문이 끈질기게 따라다닌다. 또 죽기 한 해 전인 1988년, 대구에 있는 나를 찾아와 “그에게 내 고통의 윤곽을 조금 말해주었다”라고 썼던 여행일지가 마치 ‘커밍아웃’을 한 것인 양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그 장소로 말하자면 게이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호기심을 느낄 서울의 명소인 데다가, 그는 기자이자 시인이었다. 또 그는 자기 시의 진로를 놓고 고민을 털어놓았으나, 나는 그의 말을 기억도 하지 못할 만큼 무심히 넘겨들었다. 기형도를 ‘게이 아이콘(gay icon)’으로 삼으려는 사람들은 그의 시집에 성 소수자에게서만 볼 수 있는 ‘퀴어(queer) 감수성’이 충만하다고 하지만, 지배적인 고정관념을 되풀이한다는 뜻에서 나쁜 시인은 다 ‘마초’이고, 소수자의 목소리를 실어 나른다는 뜻에서 좋은 시인은 다 ‘게이’다. 설령 그가 진짜 게이라고 한들, 본인을 포함한 그 누구에게 모욕이 되길래 이런 석명까지 한다는 말인가? 다만 너무 늦기 전에, 나만 아는 사실을 밝혀둘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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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마음 첫 다짐 잊지 않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