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에 초대형 금융위기를 불러온 이른바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그 원인 제공자로 여론의 뭇매를 맞으면서 한때 바싹 몸을 낮추던 신용평가사들이 예전의 맹위를 다시 떨치고 있다. 최근 유럽과 미국에서 국가 신용 위기가 벌어지면서다. 특히 미국은 14조3000억 달러로 묶여 있는 연방 부채 한도액이 오는 8월2일까지 인상되지 않을 경우 사상 초유의 ‘디폴트’(국가 부도)에 빠지게 된다(〈RFA 자유아시아방송〉 제199호 기사 참조). 하지만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무디스·피치 등 세계 3대 신용평가사는 오히려 이걸 기화로 미국 오바마 행정부를 바싹 옥쥐고 있다.

현재 미국 정부에 가장 위협적인 신용평가사는 S&P다. 무디스·피치에 비해 국가 부채 심사에 더 엄격하다는 S&P는 지난 4월17일 처음으로 미국의 국가 신용등급 강등 가능성을 경고해 전 세계는 물론 오바마 행정부를 충격에 빠뜨렸다. 이 회사는 1941년 이후 70년 만에 처음으로 국가 신용등급이 최우량(AAA)인 미국을 ‘부정적 전망’에 포함시켰다. 당시 S&P가 ‘부정적 전망’을 발동한 것은 연방 부채 한도 인상액을 놓고 행정부와 의회의 협상이 진척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S&P의 경고가 나온 직후 다우존스의 평균지수는 200포인트 이상 떨어졌다. S&P의 경고가 나온 뒤 무디스와 피치도 잇따라 비슷한 경고를 내린 상태다.


금융위기의 원인 제공자로 꼽혔던 스탠더드앤드푸어스(위 왼쪽)·무디스(맨 위 오른쪽)·피치(위 오른쪽) 등 세계 3대 신용평가사가 다시 위세를 떨치고 있다.

S&P는 7월14일 또다시 위협적인 경고를 내놓았다. 부채 한도 인상액을 둘러싼 행정부와 의회의 협상 진척이 없을 경우 빠르면 이달 안에 미국의 신용등급이 강등될 수 있고, 설사 타결이 돼도 3개월 내 미국의 신용등급이 강등될 가능성이 ‘50대50’이라는 것이다. 이 회사의 수석 분석가인 존 체임버스는 〈워싱턴 포스트〉 인터뷰에서 “미국이 신용등급 강등을 피하려면 앞으로 10년간 4조 달러까지 연방 부채를 줄이는 데 정치 지도자들이 합의해야 한다”라고 부채 감축 폭까지 제시했다.

체임버스의 발언을 살펴보면 지금이 부채를 줄일 수 있는 막다른 시기이며, 이번에 실기(失機)하면 다른 삼류 국가들처럼 미국 또한 더는 최고 신용등급을 유지할 수 없다는 내용이다. 미국은 오랜 세월 최우량 등급을 유지해온 덕분에 국채를 마음껏 발행해 값싼 금리로 돈을 융통해 쓸 수 있었다. 전 세계 투자가들도 미국 정부가 보증하는 국채를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자산으로 여겨 마음 놓고 사들여왔다. 하지만 등급이 강등되면 사정은 달라진다.

무엇보다 투자자들을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국채 금리가 올라갈 수밖에 없고, 그 경우 국채와 연동돼 있는 주택 대부금리와 자동차 융자금리 등도 덩달아 올라간다. 이런 금리 인상은 소비 위축으로 이어져 이제 겨우 회복세를 보이는 미국 경제를 다시 불황으로 내몰 수도 있다는 지적이다. 설상가상으로 최우량 채권만을 사들여온 투자자들도 등급이 떨어진 미국 국채를 매각할 수밖에 없다. 올 초 현재 외국인이 보유한 미국 국채는 4조4500억 달러에 이르며 중국-일본-영국 순서로 미국 국채를 많이 가지고 있다.


미 행정부, 등급 하락 막기 위해 치열한 로비

이처럼 신용등급 강등이 현실화될 수도 있다는 위기감 때문에 오바마 행정부도 지난 몇 달간 신용평가사 측을 상대로 섣부른 등급 강등을 막기 위해 치열한 막후 로비를 펼쳐왔다. 〈워싱턴 포스트〉에 따르면 S&P는 미국의 신용등급 강등 가능성을 경고한 4월보다 훨씬 앞선 지난 2월 오바마 행정부 측에 연방 부채 감축 방안이 있는지 타진하겠다는 뜻을 전달했다. 그 직후 런던과 뉴욕·토론토의 신용등급 분석관들이 워싱턴을 방문해 행정부와 의원들을 면담했지만 부채 한도 증액안을 놓고 행정부와 의회 간 현격한 견해차만 확인했을 뿐이다. 


ⓒXinhua오바마 대통령(위 앉은 이) 등 미국 행정부는 지난 5월 신용평가사 규제 방안을 내놓았다.

이런 가운데 팀 가이트너 재무장관은 S&P의 분석관들을 재무부로 초대해 미국의 신용등급 강등을 막기 위한 간담회까지 열었다. 오바마 대통령이 정부 지출 축소와 증세, 사회보장제도 개선 등을 통해 향후 12년간 4조 달러까지 연방 부채를 줄이겠다는 부채 감축안을 발표한 지난 4월13일 직후였다. 하지만 결과는 그다지 신통치 못했다. 나흘 뒤인 4월17일 S&P는 미국의 신용등급을 최우량(AAA)으로 유지하면서도 강등 가능성을 열어둔 ‘부정적 전망’에 포함시켰다. 엄청난 재정 적자에 허덕이던 영국도 2009년 5월 S&P에 의해 ‘부정적 전망’에 포함된 뒤 휘청거렸지만, 이 회사의 권고에 따라 대규모 긴축 재정을 단행해 가까스로 최우량 등급을 유지할 수 있었다.

사실 오바마 행정부로서도 S&P 등에 불만이 없는 건 아니다. 2007년 대형 금융위기를 몰고 온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벌어진 데는 신용평가사들의 무책임한 신용등급이 주된 원인을 제공했다고 보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 문제에 관한 연방 상원 소관위원회의 최근 보고서에 따르면, 신용평가사들이 2006년과 2007년 최우량 등급 판정을 내린 ‘비우량 주택담보’ 가운데 90% 이상이 금융위기 이후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정크 본드(투자 위험성이 높은 채권)로 판명됐다. 이 때문에 증권감독위원회는 의회의 요구에 따라 신용평가사를 규제할 수 있는 방안을 검토한 끝에 지난 5월 몇 가지 규제안을 내놓았다. 하지만 근본적인 문제 해결에는 여전히 한계가 많다. 평가 대상 기업이 신용평가사를 선정하고 수임료를 지불하는가 하면, 수임료에 따라 평가에 영향을 받을 수도 있는 이해 충돌 대목 등이 개선되지 않은 것이다.

신용평가사들이 막강한 힘을 유지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또 있다. 민간 은행이든 정부 연금관리 기관이든 투자 결정을 할 때는 반드시 S&P처럼 명망 있는 신용평가사의 투자등급을 참조하도록 관련 법과 규정으로 명문화돼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의회도 관계 당국에 관련 규정을 삭제하라는 내용이 포함된 법안을 지난해 통과시킨 바 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이런 신용평가사들을 대체할 만한 별도의 기관이 존재하지 않는 한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미국은 물론 전 세계 투자 기관들이 투자 여부를 결정할 때 지금도 S&P를 비롯한 3대 신용평가사의 투자등급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에서 규제 당국의 고민도 깊어진다.

더욱 가관인 것은 미국 정부조차 신용평가사의 존재 가치를 실감하고, 오히려 이들의 강등 경고를 대의회 압박용으로 적극 활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7월13일 제프리 골드스타인 재무부 차관은 S&P와 무디스의 잇따른 신용등급 강등 경고와 관련해 “부채 한도액 인상과 관련해 의회가 빨리 움직여야 한다는 점을 시기적절하게 상기시킨 것이다”라고 평가했다. 사정이 이쯤 되고 보면 S&P를 비롯한 신용평가사들의 위세는 당국의 규제에도 불구하고 앞으로도 크게 변할 것 같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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