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범 전 기재부 차관은 최근 책 〈격변과 균형〉을 썼다. ⓒ시사IN 이명익

기획재정부 관료를 흔히 ‘곳간지기’로 묘사한다. 누군가의 절박한 요구를 단칼에 거절하며 재정건전성을 외치는 ‘뿔 달린 악마’쯤으로 상상하는 사람도 있다. 시민으로서 경제관료의 관점 내지 항변을 깊이 들을 기회는 좀처럼 없다. 그들이 예산과 재정에 대해 갖는 권한을 생각하면, 지금보다는 더 많은 정보와 소통이 필요하다.

김용범 전 기재부 차관(60)은 1987년 재무부 사무관으로 경제관료 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재정경제부와 금융위원회에서 금융을 주로 담당했다. 2019년 8월부터 2021년 3월까지 약 1년 반 동안 기재부 차관으로서 코로나19 위기에 대응했다. 최근 그 경험을 책 〈격변과 균형〉(창비)에 담았다.

스스로를 ‘독립 경제학자’라 칭하는 그는 페이스북에 거시경제와 금융시장 관련 글을 종종 쓴다. 그의 책은 흔한 회고록과 달리 경제학 교과서 같은 면모를 풍긴다. 한국 경제를 향한 제언도 여럿 담겨 있다.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34년간 경제관료로 재직하며 우리 시대 가장 큰 위기 중 하나를 넘어온 이가 한국 사회에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 6월7일 김 전 차관을 만났다.

경제관료로서 1997년 외환위기, 2008년 금융위기, 2020년 팬데믹을 모두 겪었다.

외환위기는 원인이 분명하다. 경상수지나 외환수급 관리만 잘하면 막을 수 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도 전 세계를 충격파에 휩싸이게 했지만 어디까지나 금융위기였다. 반면 팬데믹은 복합 위기다. 처음엔 보건 위기로 시작됐지만, 거리두기로 사람의 이동을 멈추게 하자 경제가 급속도로 얼어붙었다. 2020년 3월엔 금융시장까지 요동쳤다. 다우존스가 미국의 대표적 주가지수인데, 1929년 대공황과 1987년 블랙먼데이, 2008년 금융위기를 포함해서 역사상 낙폭이 제일 큰 날짜 기록 10개 중 4개를 2020년 3월 한 달 사이에 갈아치웠다. 지나와서 그렇지 정말로 무서운 시기였다. (원·달러) 환율이 1296원까지 올랐으니까.

당시 기재부 차관이었는데 어땠나?

어릴 때 수영을 배우다 익사 일보 직전까지 간 적이 있다. 물에 빠졌는데 발이 디뎌지지 않을 때의 어마어마한 공포. 시장이 무너질 때 그런 느낌이 든다. 내가 경험하고 훈련되어 있던 상황과 시장에서 일어나는 상황이 다르더라. 사람들이 가장 불안할 때 찾는 게 미국 국채인데, 이번 위기에선 안전자산인 미국 국채 가격이 폭락했다. 도대체 왜 이런 현상이 생기는 거냐. 나중에 보니 (신흥국 중앙은행과 미국 펀드매니저들이 급하게 달러를 확보해야 했는데, 코로나19로 금융시장이 불안정해서) 자산이 안 팔리자 미국 국채를 내다판 거였다. 그런 상황에서도 정부는 일주일에 두 번이고 세 번이고 회의해서 평온한 척 메시지를 내야 한다. 어렵다는 걸 적절히 알리면서 안심시키기도 해야 하고. 뭐라고 메시지를 내야 하나, 나 자신도 정리가 안 되는데. 막막하고 두려웠다. 결국 달러 시스템을 책임지는 미국에서 한국을 포함한 9개 나라와 통화스와프(비상시 두 나라가 통화를 일정 환율로 교환하는 것)를 체결하기로 빨리 결정해줘서 겨우 안정을 찾았다.

2021년 10월12일 자영업자들이 정부의 방역지침에 항의하는 피켓 시위를 벌였다. ⓒ시사IN 신선영

팬데믹은 자영업자에게 큰 타격을 입혔는데 문재인 정부 재정정책은 인색했다는 평가가 있고, 그 핵심에 기재부가 있다.

변호를 좀 하자면, 위기 국면에서 재정의 역할이 무엇인지 사회적 합의 수준이 높지 않았다. 외환위기 당시 시스템이 망가지지 않도록 금융기관에 자본을 확충한 적은 있어도, 이번처럼 시민들의 일상이 어려워질 때 재정이 전방위적 역할을 한 것은 처음이다. 그런데 예산 담당자들은 보수적인 쪽으로 훈련이 된 사람들이다. 이들이 보기엔 불안하다. (재난지원금 등을) 한번 나눠주고 사람들이 환호하면 끝도 없다는 생각을 하는 거다. 게다가 재난으로 각자 입은 피해에 대한 통계가, 가장 직접적인 타격을 받은 사람일수록 정부한테 없다. 영세 자영업자 상당수는 면세점 이하이고 4대 보험 바깥에 있다. 한국은 자영업자 비율이 다른 나라보다 높다. 제도적으로 소득 파악이 잘 안 되어 있다. 이번에 여러 지원을 하면서 데이터가 쌓였으니 소중한 인프라가 될 텐데, 2020~2021년만 해도 그게 없었다. 그래서 오히려 전 국민에게 주자는 말도 있었다. 여유가 있는 상위 10%, 20%가 기부할 거라면서. 거의 안 했다. 그럼 한쪽에서는 아무 필요도 없는 사람들한테 왜 내 세금을 낭비하느냐고 비난을 듣는다. 재정 당국 입장에서는 어렵다.

2021년 1월 정세균 당시 국무총리가 아침 라디오에서 자영업자 손실보상법을 추진하겠다고 했는데, 같은 날 “법제화한 나라는 찾기가 쉽지 않다”라고 말했다. 이에 정 총리가 “이 나라가 기재부의 나라냐”라고 격노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아침에 기재부나 금융위에서 보고가 쫙 올라온다. 대면 보고도 있지만 메모 보고라고 해서 보고서들이 산처럼 쌓여 있다. 손실보상 제도화 관련 각 나라 사례를 알아봐달라고 요청했더니 5~6페이지 되는 보고서가 올라왔더라. 몇몇 나라를 검토한 결과 제도화가 기계적으로 되는 나라는 없다는 내용이었다. 총리님 아침 인터뷰를 못 들은 채로 브리핑에 들어갔는데 질문이 나왔다. 읽은 보고서가 머릿속에 남아 있어서 소개했다. 그런데 기자들이 보기에는 마치 (기재부가 반기를 든 것처럼) 된 거다. 총리님께 연락이 왔기에 상황을 설명하고 보고서를 올려드렸다. (이후 정 총리가 방송에 출연해 “개혁에는 저항 세력이 있다”라고 말한 것은) 상황을 아시면서도 기재부에 따끔하게 한 말씀 하셔야겠다는 메시지로 읽었다.

손실보상법이 코로나19 유행 1년 반이 지난 2021년 7월에야 통과되었다.

여의도(정치인들)나 피해를 입은 분들은 어떤 기계적인 산식에 따라 자동으로 손실을 보상하는 제도를 기대했다. 기재부는 그게 어렵다고 한 거다. 돈을 안 주겠다는 게 아니라. (기계적 손실보상을 하려면) 시가 보상을 해야 하는데 시가가 얼마인지 객관적으로 결정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고, 소송이라도 제기되면 모든 게 멈춘다. 적기 보상이 안 된다. 결국 기재부 안대로 법에는 원칙만 정하고 디테일은 시행령에 위임했다.

소급적용은 왜 안 했나?

이전에 많든 적든 불완전하나마 지원금을 지출했다. 어떤 사람들은 지방정부에서도 받았다. 손실보상이라는 이름은 안 붙었지만 각종 수당 명목으로 나간 돈도 있다. 전 국민 재난지원금도 뿌렸다. 예산실 계산에 따르면 손실보다 더 많이 받은 사람도 있다. 그럼 (손실보상을 소급적용할 경우 이미 지급된 지원금을) 회수할 건가? 기재부로서는 재정낭비를 걱정할 수밖에 없다.

관료는 그럴 수 있어도 선출 권력이 추진하면 뜻이 관철되는 게 맞지 않나?

맞다. 기재부는 현실 재정을 책임지니까 완벽하진 않지만 자기 안을 내고 걱정을 전달한다. 그럼 선출 권력이 ‘안 된다, 이번에는 해야 한다’ 말할 수도 있다. 그 결정을 안 한 거다. 당·정·청 협의를 그렇게 많이 하고 때로는 험한 말과 고성이 오갔는데도 왜 중심에서 청와대가 기재부 의견을 들었는지는 거버넌스 측면에서 연구를 해봐야 한다. 분명한 건 기재부 단독 결정은 아니다.

기재부가 본예산을 짤 때보다 세금이 지난해 61조4000억원, 올해 53조3000억원 더 걷혔다.

나는 (2021년 3월에) 떠나긴 했지만 정부가 머쓱해지는 순간이다. 쓸 돈이 없는 것처럼 말했는데 결과적으로 균형재정 관점에서도 꽤 여유가 있었으니까. 의도를 가지고 세수 추계를 잘못한 건 아니라고 본다. 팬데믹 이후, 혹은 그 이전부터 달라진 구조에 맞는 거시경제 모델을 아무도 갖고 있지 못한 게 아닌가 싶다. 각 나라 중앙은행도, 한국의 기재부도 거시경제 모델을 가지고 있는데 이게 점점 안 맞는다. 시장이 개방되고 금융의 역할이 커지고 서비스 산업화가 진행되고 기술 발전으로 부가가치의 원천이 달라지는 경향이 잘 반영이 안 된다. 어디선가 이익은 났는데 모델을 보면 별로 그렇지 않다. 팬데믹으로 기존의 질서가 헝클어지면 더 안 맞는다. 미국도 인플레이션을 예측하지 못해서 고생하잖나. 정부가 진지하게 되돌아봐야 한다. 시민들이 부담을 더 많이 지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한국의 재정 여력을 두고 의견이 갈린다.

대한민국 재정은 ‘초우량아’다. 그런데 고령화 추세를 감안하면 5년, 10년 뒤에는 악화될 수밖에 없다. 가계부채가 많고 외환위기 경험도 있는 만큼, 금융시장이 불안해졌을 때 정부가 공적자금을 투입할 수 있는 버퍼(여유)를 확보해둬야 한다고 보는 사람도 많다. 분단국가니까 통일비용도 고려해야 한다. 지금 당장 재정수지나 국가부채비율이 OECD 다른 나라들보다 낫더라도 지금부터 보수적으로 운용해야 한다는 생각이 전반적으로 강하다. 틀린 주장은 아니다. 한쪽에서는 그래도 여유가 있고 양극화가 심한데 재정이 역할을 해야 하지 않느냐고 본다.

어느 쪽인가?

재정의 역할은 더 커질 수밖에 없다. 다만 재정정책의 여력을 둘러싼 논쟁이 좀 더 진지하게 이뤄지면 좋겠다. 제대로 된 논쟁을 해야 할 요소들이 분명 있다. 금리가 장기적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 가계부채는 얼마나 위험한가? 한국의 제조업이 계속 경쟁력을 가질 수 있을까? 연금 개혁은 얼마만큼 가능한가, 혹은 불가능한가? 아쉽게도 이런 이야기는 별로 없고 마치 종교가 다른 사람들처럼 확신에 차서 서로 싸운다. 국가부채가 일정 규모 이상으로 커지면 나라가 망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대한민국 관료들이 엄살을 피워서 그렇지 현대통화이론(MMT)이라고 혹시 들어봤느냐면서 사실상 무한정 국채 발행을 해도 된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 물론 MMT를 주장할 만한 배경도 있다. 반대로 외환위기까지 가면 안 되는 것도 맞다. 그렇다면 중간에서 건설적인 논쟁을 해야 하지 않을까?

대선에서 GDP 대비 국가부채 비율이 화두였다.

재정정책은 본질적으로 정치적이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대한민국 국채를 사는 사람들에게 물어보라는 것이다. 신용평가사, 투자자, 연기금에 물어봐야 한다. 한국이 이러이러한 사회문제를 안고 있고 이 정도 재정 여력이 있는데, 단기적으로 이만큼 쓰겠다고, 몇 년 지나면 이렇게 정상화하겠다고 짜임새 있게 설명하면 확장 재정을 펼 수 있다. GDP 대비 몇 퍼센트면 괜찮고 몇 퍼센트면 불안한, 간단하고 단순한 하나의 기준은 없다.

국민연금 개혁을 강조했다.

국민연금은 4대 보험 중 가장 덩치가 크면서도 가장 나빠질 수밖에 없는 구조다. 설계할 때는 좋은 조건으로 했다. 적게 내고 많이 받도록. 받아갈 사람이 별로 없을 땐 문제가 안 됐다. 돈만 쌓였다. 시간이 지나서 적게 내고 많이 받아가는 사람들이 본격적으로 나오자 문제가 생긴다. 돈은 빠져나가는데 보험료를 낼 인구는 점점 줄어드니까. 젊은 세대는 ‘우리는 받을 돈이 없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지만, 이대로 가면 보험료율이 (현행 월 소득의 9%에서) 30% 안팎으로 오른다. 이러니 젊은 사람들이 보험료를 안 내겠다는 것 아닌가. 국민연금이란 한 세대와 다음 세대를 연결하는 가장 보편적인 사회보험인데, 젊은 세대가 보험료를 내지 않겠다고 말한다는 건 공동체의 연대가 최악의 상태라는 뜻이다. 굉장한 위험신호다.

6월8일 노인들이 서울 종로구 탑골공원 주변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시사IN 신선영

국민연금 개혁이 확장 재정의 전제조건인가?

그렇다. 국민연금을 개혁하지 않으면 지금 상태에서 재정을 다른 데에 최대한 덜 써야 국민연금에서 난 결손을 그나마 메울 수 있다. 이러면 재정을 더 써야 한다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그만큼 약해질 수밖에 없다. 관료들이 공포 마케팅을 한다고, 양치기 소년이라고 주장하는데 진보 쪽 사람들도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이걸 외면하면서 냉혈한이라고 쏘아붙이면 대화가 안 된다. 모피아가 무슨 악당은 아니잖나. 답답한 사람들이지만, (위기관리에) 편향된 시각을 갖도록 국가가 훈련시킨 사람들이다. 관료들을 설득할 방법이 없느냐 하면 그렇지 않다. ‘당신들이 너무 보수적으로 봐서 그런데 거시경제가 이런 상황에서는 오히려 재정을 더 써야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지 않고, 세수도 이러이러한 요인 때문에 여유가 있다’고 설득하려면 할 수 있다. ‘나쁜 놈들, 선거가 코앞인데’라고만 말하니 관료들이 동의할 수가 없는 거다. ‘기재부의 나라’ 얘기가 나왔을 때 더불어민주당이나 시민단체 사람들한테 말했다. 기재부가 문제라면 부총리를 바꾸면 된다고. 왜 안 바꿨을까, 대통령이. 완벽하진 않지만, 기재부의 대안보다 더 나은 조합을 제시하면서 설득할 수 있는 능력이 (정당이나 시민단체에) 없는 거다. 능력이라고 하면 좀 미안하지만.

직무급 도입과 연계한 정년 연장도 언급했다.

정년 연장을 안 하면 방법이 없다. 연공서열을 깨지 않는 정년 연장은 완전히 나쁜 이야기다. 세대 간에 절대 동의하기 어렵다. 나이 들면서 기술이나 생산성이 따라가지 못하게 되는 경우도 있으니까. 호봉제를 깨고 직무급(하는 일에 따라 임금 지급)에 어느 정도 합의해야 정년 연장이 가능한데, 여유가 있는, 상위 10~15% 정도의 대기업·공기업·금융회사 노조들이 직무급에 동의를 못한다. 40대 후반이 되면 다 연공서열 뒤에 숨어버린다. 변화가 두려운 거다. 나는 운이 좋은 일부 노조들이 (정년 연장의) 발목을 잡고 있다고 본다. 한국 사회에 무한한 자부심을 갖고 있으면서도 어떤 면에선 어둡게 보는 이유다. 정년 연장 하나도 합의를 못하는 나라다, 대한민국이.

75세 이상에게 기초연금을 한시적으로 20만원 인상하자고 제안했다.

연금을 적용받는 사람들은 좀 나은데, 75세 이상은 국민연금 해당 사항이 없다. 연금제도가 늦게 도입되면서 가입을 못했다. 가입했더라도 (최소 가입 기간인) 10년 든 게 전부다. 월 20만~30만원밖에 못 받는다. 이분들에게 (국민연금에 가입하지 않았더라도 세금으로) 특별연금을 월 20만원씩 한시적으로 지급하자는 거다(여기에는 20년간 연 4조~9조원, 총 141조5000억원이 소요된다고 김 전 차관은 추계했다). 그 정도 재정 여력은 대한민국이 갖고 있는 거 아닌가, 인간적으로. ‘꼰대’ ‘틀딱’들을 왜 지원해줘야 하느냐고 젊은 세대가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다 누군가의 할머니, 할아버지다. 그 돈이 어디 가는 게 아니라 손자 손녀나 영세 자영업자에게 간다. 가계부채와 노인 일자리를 미시적으로 들여다본 사람으로서 제일 가슴이 시린 과제가 노인 빈곤이다. 나만의 해법을 냈는데, 대한노인회에서 관심이 없다(웃음).

금융위 부위원장이던 2017년, 법무부가 가상자산 거래소를 폐쇄하려던 것을 실명계좌 도입으로 돌렸다. 최근 폭락한 이른바 ‘테라-루나 사태’를 어떻게 봤나?

어떤 면에선 제도화가 필요하다는 걸 절감하게 해준 사건이다. 블록체인 기술이 과장되었다고도 하지만 분명한 건 이를 활용한 여러 시도가 나오리라는 것이다. 이 중에서 어떤 아이디어는 오래 남아 표준이 되고 다른 아이디어는 사라질 거다. 무엇이 옥석일지 모르지만 시도는 계속해야 한다. 한 나라가 금지한다고 해서 막을 수도 없거니와, 블록체인 분야에서는 한국이 잘할 가능성이 많다. 디지털화가 세계 최고 수준이고 젊은 세대의 학력도 높으며 투자자 층도 두껍다. 국제 금융시장에서 원화는 존재감이 미미하지만 디지털 영역에선 다를 수 있다. 제도화는 실기하면 안 된다. 최근 일어난 문제들이 좋은 참고가 될 거다. 플랫폼과 빅테크 기업이 통화 주권에 상당한 도전을 제기하고 있는데, 여기에 대해서도 정부가 경각심을 가지고 제도를 보완해야 한다.

2050 탄소중립 추진전략 실무를 총괄했다.

한국이 몇 년 전부터 선진국들로부터 기후 악당이라고 주목받았다. 개발도상국에 발전소 지어준다고. 억울한 측면도 있지만 2020년 9월 중국 시진핑이 ‘2060년 탄소중립’을 선언하면서 할 말이 없어졌다. 우리도 2050 탄소중립을 선언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제조업 경쟁력을 유지하면서 탄소를 줄일 묘안이 잘 안 보인다. 탄소중립을 이행하면서 경제발전을 계속할 수 있을지가 향후 한국 경제의 30년을 좌우하리라 본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터지면서 탄소중립이라는 목표를 달성하기가 더 어려워졌다. 가뜩이나 기후위기 대응이 에너지 가격을 높이는데, 전쟁이 터지면서 에너지·원자재는 물론 식량까지 비싸졌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글로벌 금융위기, 팬데믹에 이어 21세기 제3의 격변이라고 본다.

지난 3월5일 우크라이나 피란민들이 폭격으로 무너진 다리를 건너고 있다. ⓒAP Photo

최근의 인플레이션은 어떻게 보나?

2008년 금융위기 당시 (대규모로 돈을 푸는) 양적완화의 후유증을 회복하지 못한 상태에서 팬데믹을 맞았다. 여기에 대응하기 위해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연준)가 2020년 역대급으로 많은 돈을 단기간에 풀었다. 보건 위기가 어느 정도 진정되자 인플레이션이 찾아왔다. 연준에서 ‘빅스텝’이란 얘기를 해가며 금리를 올리고 긴축을 예고했다. 이렇게 대규모로 양적 팽창을 해놓고 빠른 속도로 긴축 모드로 전환해본 경험이 미국 연준조차도 없다. 이 과정에서 금융시장이나 거시경제에 대한 충격을 최소화할 수 있을지 물음표다. 이번 인플레이션이 일시적인지는 의견이 갈리지만, 물가상승 요인은 생각보다 넓게 퍼져 있다. 어느 시점에 자연스럽게 꺾인다기보다는 어렵다고 보고 보수적으로 대비해야 할 것이다.

왜 경제관료가 되었나?

중고등학교 시절이던 1970년대에 오일쇼크로 경제가 정말 어려웠다. 원래는 의사가 되어 어머니 병을 고치려다가, 나라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어서 경제학을 전공했다. 내가 관료로 일한 34년은 중간 중간 위기도 있었지만 세계화의 확장을 경험한 행운의 시기였다. 이제는 역세계화라는 말이 나오고 스태그플레이션(경기침체와 물가인상이 동시에 나타나는 현상)이나 폴 볼커(오일쇼크 당시 인플레이션을 잡겠다며 금리를 대폭 올린 연준 의장)가 소환된다. 40년 만에 이게 뭔가 싶다. 향후 30년이 더 어려울 것 같아서 여전히 일해야 하는 동료들에게 애잔함이 있다.

정부에 좀 더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이 들어와야 한다고 했다.

나 스스로가 농촌에서 태어나 밭에서 고추 따다가 잠깐 기회가 열려 있을 때 공교육 사다리를 타고 장학금을 받아 유학까지 다녀온 사람이다. 광주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며 어려운 일(5·18)도 직접 보면서 사회문제에 더 눈을 뜨게 되었다. 그런 면에서 지금은 (기재부나 금융위에) 8학군, 외고 등 너무 균질화된 사람이 들어오는 것 아닌가 걱정이 든다. 물론 훌륭한 후배들이 많고 보고서도 잘 쓰지만, 본인이 경험하지 않은 사람들을 직접 알기란 어렵다. 세종시에 있어서 더 그럴 수 있다. 정책 당국이 여유가 있고 금융거래를 하는 사람들의 정보는 잘 파악하고 있다. 그렇지 않은 사람의 정보는 별로 없다. 정당의 존재 이유나 대표성하고도 연결된 문제다. 한국 사회가 좀 이원화되어 있으니까. 정책을 만드는 사람들은 각 영역에서 누구에게 어떤 어려움이 있는지 면밀히 천착해야 한다. 복합 위기의 시대에는 경제학만으론 대응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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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마음 첫 다짐 잊지 않겠습니다